이 책의 주제는 수사학의 역사가 아니다. 이 책은 학제간 연구의 관점에서 수사학, 언어학, 정치학, 문학 이론의 개념을 두루 차용한다. 물론 역사적 사실도 담겨 있다. 수사학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언어를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맥락 안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불변의 수사학 법칙 같은 것이 있다는 주장에 다소 회의적이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같은 삼절문 기법은 천년 넘도록 매우 효과적인 조합으로 부동의 명성을 누렸지만, 이것이 두뇌의 타고난 속성을 반영하는 것인지 그저 오래된 문화적 습관인지는 분명치 않다. --- p.12∼13
브라이언 비커스 말마따나 “플라톤은 수사학을 희화화함”으로써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소피스트의 명성은 “플라톤의 일격에서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군중의 비합리성과 공적 언어의 남용에 대한, 널리 퍼지고 뿌리 깊은 두려움을 건드리지 않았다면 플라톤이 이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리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를 부당하게 대접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정치인과 법률가의 허울뿐인 언어 사용에 대해 우려한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었다. --- p.25
수사학은 문학, 과학, 경제, 사적 대화와도 관계가 있다. 수사학이 어떻게 수용되는가는 기술, 문화, 사회 내의 권력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꾸준히 효과를 발휘하는 기법이 있지만, 그 자체로 성공을 보장하는 규칙은 없다. 그런 규칙을 정하려는 시도는 계급, 성별, 인종 같은 전제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 한 사회의 논증은 그 사회가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를 드러내며, 사회가 논의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어떻게 논증할 것인가에 대한 논증은 그 사회의 사회적 DNA를 해독하는 수단이다. --- p.53
수사적 분석의 한 가지 목표는 말을 ‘해독’하여 그 속에 새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맥락에서 특정한 진술이나 상징의 사회적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쨌든 평범한 영화 관객은 히치콕이 제시하는 아이러니를 해독하거나 해니의 말이 상황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 p.97
볼거리, 몸짓, 폭력과 결합된 말은 히틀러의 정치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히틀러는 문어보다 구어를 중시했으며 스탈린처럼 연설문을 직접 썼다. 하지만 스탈린과 달리 표현 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에, 구호를 만드는 일은 주로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에게 맡겼다.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목소리에 굶주렸다(“총통께서는 언제 말씀하십니까?”). 히틀러가 1944년 암살 기도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방송 연설을 중단했을 때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히틀러가 국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점차 줄여간 것은 전쟁 지도자로서 명백한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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