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잡지에 연재할 소설 애기를 하고 있을 때, 다카나시 편집자잉 느닷없이 이런 말을 꺼낸다.
'포르노 소설을 좀 써 보지 않겠어요?'
편집자라는 하는 사람들이란 대개의 작가들에게 포르노 소설을 쓰도록 권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작가 쪽에서도 은근히 그런 소설을 써 보고 싶은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장의 힘으로 독자에게 성적 흥분을 안겨 주고 싶은, 소설가로서의 야심을 채워 주는 자극적인 장르가 성애를 주제로 한 소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다.
--- p.8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러 사람을 만나도 제 자식을 만날 수 없는 사람만큼 외롭고 쓸쓸한 사람은 없다. 그에 비하면 명성이나 돈 따위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거야. 갖고 싶어도 절대로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그게 제 자식이잖아. 애를 키운다는 건 아주 힘겨운 일이지. 24시간 내내 돌봐줘야 하니까 다른 일은 할 수도 없어. 하지만 아기를 낳으면 인생이란 괴롭거나 고통스러워도 역시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을 거야. 너도 하나라도 좋으니까 낳도록 해라.
--- p.168
욕망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이라 할지라도 사회가 인정하는 일정한 수위에서만 인정할 수 있다. 현대는 최강국의 대통령, 세계적의 대스타라 하더라도 가정을 가진 채 동시에 애인을 사귀는 일은 어렵게 되어있다. 열대 우림을 벌채하는 것처럼, 욕망은 싹이 잘리고, 기껏해야 인간은 한두개의 욕망을 선택할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들은 경제의 불황보다 욕망의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느 주간지로부터 포르노 소설을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주간지 연재를 시작하면 경제적으로는 넉넉해 지겠지만, 다카나시와의 약속을 깨뜨리고서 지금 이 노트에 구상하고 있는 소설을 주간지로 넘겨 줄 수는 없다. 비아그라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게 된다면, 성인 비디오나 누드 사진집도 그렇겠지만 포르노 소설같은 것은 더욱 찾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이런 메모를 하고 노트를 덮었다. 현재 나는 50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40킬로그램 가까이 떨어져 버렸다. 앞으로 10분뒤에 옷을 갈아입고 예약해 놓은 치과 의사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내일이 마감인 에세이는 아직 한 장도 쓰지 못했다.
--- p.123
당시 같은 교실에 있던 나는, 그런 치한 행위, 그러니까 남자가 손가락으로 아이들의 미묘한 부분을 건드리는 그 성적인 행위를 하는 치한이나, 그렇게 당하고 있는 아이들이나, 쾌감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면서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야기들 대부분이 재미삼아 일부러 지어낸 음담패설이었던 듯싶다--.
--- p.81
남자가 여자 몸 구석구석에 애착을 갖는 것은, 상상력을 작동시키지 않으면 성적인 흥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방을 좋아하는 것은 빨거나 주무르는 행위가 기분좋게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상대방 여자가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자가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 p.13
나는 작품에서 남자를 그리려면 신화적인 존재로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남자의 얼굴이나 성격도, 육체도, 신화성으로 채색된 것이어야 한다. 정장 차림으로 도심의 빌딩가를 걸어 다니는 광기와 지성과 늠름한 육체를 가진 남자......
그러나 현실 속에서 만나는 사람은, 좀스럽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남자들이었다. 나에게서 떠나간 눈을, 귀를, 손톱을, 그리고 엉덩이, 입술, 어깨, 팔, 손가락, 머리칼, 뺨, 이빨, 페니스, 젖꼭지, 수염, 다리, 손, 목소리, 등을 가진 남자를 나는 그리워한다.
--- p.206
그는 노를 젓다가 땀투성이가 되면 남의 눈은 신경 쓰지도 않고 티셔츠와 바지를 벗고 트렁크만 입은 채, "하나, 둘"하고 스스로 구령소리에 맞춰 맹렬한 스피드로 전진했다. 한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눈부셨지만 보트를 타는 게 유쾌하여, 나는 햇볕에 그으른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10대 중반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하기 시작한 나는, 이른바 데이트라는 것을 한 적이 없고, 남자와 배드민턴을 치거나, 남자가 보트를 태워 준 것도 태어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남자와 만나는 곳은 으레 밤 여덟 시 이후의 술집이나 호텔이었다. "아, 날씨 좋군. 다음주에도 맑게 개면 바다에 가자구" 하고 갓 샤워를 한 그가 완전히 벌거숭이가 된 채 우리 집 맨션의 베란다로 나왔다. "벌거벗고 나오지 말아요" "바다로 가자구"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배란다의 난간을 잡고 도로를 내려다보았다. "헤엄칠 줄도 모르고, 수영복도 없어요. 게다가 더운 게 싫고, 모래투성이가 되는 것도 싫어요." "내가 헤엄치는 걸 가르쳐 줄게." "무리에요, 이제 와서 새삼 스럽게…." "괜찮아, 잘 가르쳐 줄 테니까." 그는 언제나 억지로 떠밀고 나갔고, 나는 가고 싶지 않아도 그가 걸어가기 시작하면 따라갔다. 나는 그의 다리를 쳐다보는 것이 좋았다. 깡충깡충 달려가면 , 뭔가를 뛰어넘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를 어딘가에 데려다 주는 다리. 양지 쪽으로. 그의 다리에서는 햇볕과 흙과 땀의 냄새가 났다.
--- p.162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현실과 허구의 틈새에 빠져 가고 있는 나를 틀림없이 육지로 끌어올려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계속 만나면, 나는 그의 자식을 낳고, 둥지를 튼 어미새처럼 청소와 세탁, 쇼핑을 하고, 그와 자식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두 사람이 먹은 접시를 닦고, 그의 보호를 받으면서 함께 늙어간다. 그렇게 되면 나는 글을 쓸 수 없을 것이 틀림없다.
---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