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언, 어서. 태풍이 오고 있어. 여길 떠나야 해. 난 서울로 가야하고.
나는 그 아이를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욕실로 끌고 들어가 온몸에 비누칠을 하여 깨끗이 씻겨 주었다. 욕실에서 나온 우리는 옷을 입기 전에 오래도록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 아이가 더 이상 유민처럼 헤매다니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남녀가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는 것은 섹스와는 또 달리 하나의 기도 행위임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바깥으로 나오니 태풍이 오기 직전의 하늘은 유리알처럼 투명해져 있었다.
헤어지덜도 뭘 좀 드셔야 해요. 선생님은 정말 뭘 드셔야 해요.
나야 … 그동안 네 살을 도려 먹으며 연명해 왔는걸. 난 그저 소주 한 잔이면 돼.
어머머, 우린 아예 하지도 않았는데 살을 도려 먹다니 그건 무슨 말이에요? 그리고 또 술?
그 아이는 눈을 흘겼다. 나는 유리알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까운 음식점으로 들어간 우리는 찌개와 밥 한 공기를 시켜 놓고 마지막 술잔을 부딪쳤다. 유리의 맑은 소리가 귀에 울렸다.
--- p.171
문학비평이 아무리 다양한 목적에 봉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일차적인 목표는 독서 대중의 문학 취미를 세련시키고 문학 교양을 육성하는 데에 있다.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을 가려 읽는 안목을 길러 주는 것, 작품 읽기를 즐겁고 유익한 체험이 되게 하는 것, 문학으로부터 보다 인간적인 삶에 필요한 언어를 얻도록 도와주는 것은 비평이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이다. --- 그런 점에서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같은 책자가 있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 머리말
그러니 은오의 수첩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는 사실이 내겐 뜻밖이었다. 새해가 되면 전화번호부 목록에서 없애야 할 사람과 그대로 남겨야 할 사람을 골라 수첩을 정리하곤 했다. 해마다 수첩의 전화번호부는 얇아졌다. 몇 년 동안 연락이 끊겨 아직 그 번호를 사용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번호를 없애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중에는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도 있었고, 털어놓을 비밀이 남아있는 사람도 잇었다. 나는 은오의 수첩을확인하고 싶었다. 거기 적힌 내 이름을 직접 보고 나면 의문이 조금 풀릴 것도 같았다.
--- p.129
그때 나는 보았습니다. 붉은 다리 아래의 더러운 기름투성이 바닷속에 반쯤 가라앉은 채 둥둥 떠가는 소연의 모습을. 처음에 그것을 보았을 때는 너무 현기증에 지쳐서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헛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연은 컬이 풀어져서 엉망이 된 머리를 하고 값비싸 보이는 레이스의 블라우스를 입은 채로 부둣가의 좁은 바다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 레이스의 블라우스는 흔한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살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