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유교 윤리가 지배하던 조선 시대에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 하여 일곱 살만 넘으면 남녀가 나란히 앉을 수 없도록 금지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조선 시대의 남녀칠세부동석처럼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서로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금하는 엄격한 경제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금산분리’라 한다. 산업자본인 대기업과 금융자본인 은행이 서로를 소유할 수 없다는 뜻의 금산분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마치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원칙이며 오랫동안 법률로 명시되어 지켜져 왔다. 은행법 제16조 2항을 보면 대기업이 은행 등 금융기관의 전체 주식 중 4% 이상을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혹 4% 이상 보유하고 있더라도 경영권이나 의결권은 행사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은행 등 금융자본 역시 대기업 지분을 20% 이상 보유하면 금융감독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해 금융자본이 기업을 소유할 수 없도록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처럼 금산분리는 종교 계율처럼 매우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다음과 같다. 금산분리 원칙의 근거우선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할 경우 국가 경제에서자본 배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은행이 기업의 사금고화私金庫化)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은 사업 확장을 위해 항상 자금 조달을 목말라 하기 마련인데 자금 중개 기능을 하는 금융기관, 특히 거대 자본을 중개하는 은행을 소유하면 이 기관을 마치 자기 기업의 사금고처럼 악용하여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이 자금으로 추진한 사업이 실패했을 경우 은행의 부실로 이어져 산업과 금융이 연쇄 도산에 처함으로써 국가 경제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재벌 등 대기업이 제2 금융기관들을 소유하면서이런 폐단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따라서 금산분리법은 위험을 분산하고 특정 산업자본이 부실 위기에 처하더라도 자금 배분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공론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금산분리를 유지하지 않을 경우 부(富)가 편중된다는 이유이다. 금산분리 원칙이 겉보기에는 양 방향인 것 같지만 금융자본이 기업을 소유하려는 경향은 약한 반면,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하려는 경향은 강하기 때문에 사실 이 원칙은 산업자본의 은행 소유를 차단하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하지만 은행을 소유하려면 거대 자본을 보유해야 하는데 이런 조건에 해당하는 대상은 금융자본 외에 재벌 등 대기업과 정부뿐이다. 그런데 재벌 등 민간 대기업이 은행까지 소유하면 부의 편중이 가속화돼 빈부 격차가 더 심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정책 담당자들과 시민 단체 및 일반 국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이런 이유로 금산분리는 우리나라에서 깨뜨려서는 안 될 경제 계율로 인식되어 왔다. 사실 부가 어느 특정 계층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은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부의 재분배는 과세와 기부 문화의 확산 등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으며 꼭 금융과 산업을 격리시켜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산분리 원칙의 문제점
금산분리 원칙은 앞에서설명한 취지에 맞는 장점들도 있는 반면, 부작용 또한 결코 작지 않다. 가장 눈에 띄는 단점은 이 원칙을 고수하는 바람에 1998년 외환 위기 이후 많은 은행이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떤 국민인가? 외세라면 어떤 이유에서도 배격해야 하는 국민이다. 그런데 같은 핏줄인 재벌에게 은행을 넘기는 것을 극구 반대하다 보니 그렇게 배격하는 외국 자본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물론 외국 자본이 재벌보다 나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는 우리나라 국민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만은 분명하다. 한두 개 정도의 은행이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면 별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농협과 기업은행, 산업은행 등 국책 은행 및 공적 자금이 투입된 우리은행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중 은행 지분이 외국 자본에 점유되어 있다. 그중에서 제일은행(현 SC제일은행)과 외환은행, 씨티은행(구 한미은행) 등은 2010년 현재 전적으로 외국 자본에 의해 경영되고 있는 상태다. 대기업이나 외국 자본이 아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우리은행처럼 정부가 주인이 되는 국영 방식도 있지만 많은 공기업이 ‘신의 직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만한 경영을 한다는 점과 과거 관치 금융의 폐단을 기억할 때 이는 분명 적절한 답이 아니다. 또한 국민연금 등 연기금이 소유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국영과 다를 바가 없다. 이도 저도 아니면 금융자본이 은행을 소유하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금산분리 원칙에 위배되지는 않지만 금융자본의 집중 역시 국민이 원하는 바는 아니다. 결국 경쟁력을 갖춘 국내 자본에 의해서 은행이 경영되도록 하려면 결국은 산업자본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둘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사금고처럼 운영되는 문제는 관치 금융에서도 발생했으며 금융자본이 은행을 소유하더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이는 금융 위기 과정에서 드러난 월가의 투자 은행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외환 위기 때 부실 은행으로 전락한 은행들 역시 산업자본의 사금고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며, 2008년 가을 우리나라의 CDS(Credit Default Swap) 프리미엄이 치솟고 외환 부족 위기를 고조시켰던 은행들의 무분별한 단기 외채 차입도 재벌들의 사금고였기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문제는 미우나 고우나 외국 자본보다는 국내 자본이 낫다는 점이고, 운영 문제는 철저한 감독과 적절한 규제에 의해서 보완하면 될 일이다. 물론 외국 자본이라고 무턱대고 배척할 일은 아니다. 앞선 경험과 선진 금융 기법을 배우기 위해 하나나 둘 정도는 외국 은행이 있을 수 있다. 현재의 홍콩상하이은행(HSBC 그룹)과 과거 씨티은행처럼 말이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고 금산분리만을 고집하다 대부분의 은행을 외국 자본에 넘겨준다면 결국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