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작이란다…….”
세이렌은 그렇게 말해 놓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린 물푸레나무는 재촉하듯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세이렌, 무엇이 시작이라는 거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가요?”
세이렌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어린 나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저 이파리들은 땅에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무와 함께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아니란다. 이제 이파리는 나무와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어. 떠날 시간이거든.
이파리에겐 나무를 떠날 시간이 있는 거란다. 그걸 ‘이별’이라고 하지.”
---'생애 처음, 낙엽을 보고 놀란 미요와 세이렌의 대화 중에서'
“다른 나무들도 나와 똑같은 일을 겪고 있다는 데서 힘을 얻었어요. 처음엔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신의 아픔을 꽁꽁 숨겼지만, 조금씩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자 우린 서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동안 우리가 저마다 놀라운 방식으로 성장했다는 것도 깨달았지요. ‘살아 있음이 가장 아름다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간 거죠. (……) 나는 삶의 변화에 맞서 고집을 세우는 것보다, 자신을 그 흐름에 맡기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어떻게 삶이 변해 버릴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겠지만, 그 변화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어요. 내 말을 믿어요, 꼬마 아가씨. 때가 되면 떠나보내는 게 좋아요.”
---'몇 년 전, 폭풍으로 시련을 겪은 앵두나무가 미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얘야, 네 앞에는 무수히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 시간들은 너를 지금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강인하게 만들어 줄 거야. 이별이란, 우리가 살면서 겪어야 할 수많은 경험 중 하나란다. 그건 크다면 클 수 있고, 작다면 작다고 할 수 있는 감정의 경험이지. 하지만 이제 네 의지로 그 이별을 준비할 때란다. (……) 나 역시 내가 이파리들로 풍성해지는 게 좋긴 하지. 하지만 때로는 이파리나 열매를 다 떠나보낸 후,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서 온전히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단다. 온몸으로 뜨거운 햇빛과 빗방울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도 필요한 거야. 떠나보낼 것을 다 보낸 후에도 자신을 감당해야 하는 시간은 남는 법이니까.”
---'세이렌이 이파리를 떠나보낼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미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넌 이미 이별을 준비하는 법을 네 안에 가지고 있단다. 그건 우리 몸 안에 있는 자연이니까. 다만 네가 생각할 수 있는 시기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 소중히 간직해 온 것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 하지만 이런 감정들 역시 너의 친구란다. 그 감정들을 존중하고 그것들로부터 자연을 배우거라. 제때에 찾아온 이별이라면, 거기서 다른 소중한 감정들도 발견하게 될 거야.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평온함을 느낄 거야.”
---'세이렌이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미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그 남자에게 이파리 하나를 주신 거죠? 아프진 않았나요?”
“물론 조금 아프긴 했지. 아직 그 이파리를 내 몸에서 떠나보낼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픔보다는 내 친구들에 대한 애정이 더 중요했단다. 그들에겐 위로가 필요했고, 난 위로해 주고 싶었거든. 내 일부분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단다.”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린 물푸레나무는 아직도 멍한 듯 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파리들과 함께 살아왔단다. 그들과 헤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얘야……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담아 둔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란다.”
---'세이렌이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이에게 이파리를 주는 장면에서'
어느 날 문득, 자신에게 생겨나는 이별을 목격하는 것은 하나의 이상한 동화가 자신의 몸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별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그보다 많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 그런 점에서 이별을 이해해 간다는 것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껍질을 밖으로 놓아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누군가와 헤어진 경험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곳에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자연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별은 우리 안에 있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그 자연이 흘러나올 때 우리의 힘으론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별은 한 자연이 다른 자연으로 옮겨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신의 동화라는 점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동화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난해하고 곡절 많은 책 속에 파묻혀 지내다가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이 책에서, 나는 내 안에 단순하고 명징한 ‘이별의 자연’이 투명하게 흘러 있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 '역자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