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아스를 만나게 된 사연
'한 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소설.' 이런 투의 문구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출판사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른바 판매촉진용 광고카피입니다. 물론 그때그때 표현을 약간씩 변형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출간 즉시 중판 돌입!'이라는 카피와 거의 동일한 수준의 유치함을 지니고 있는, 그래서 조금은 진부한 표현이지요. 그렇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명실공히 그런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입니다.
뜬금없이 진부한 카피 이야기로 역자 후기가 시작되는 이유를 지금부터 아주 조금만 설명할까 합니다. 「엘리아스의 지팡이(원제 Castle of Wisdom)」는 아마존.com에서 발견한 책입니다. 직업상 아마존이라는, 이른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고 주장하는, 사이트를 자주 들르곤 합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사냥감을 찾아 아마존 정글 속을 무작정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팡이를 들고 창을 울러맨 엘리아스가 수수한 가죽옷을 입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처음엔 제목과 표지를 보고선 무덤덤하게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약간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되어 꼼꼼히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제목은 지혜의 성(Castle of Wisdom), 출간년도는 1999년, 저자는 레트 엘리스(Rhett Ellis), 출판사는 스파클링 베이 북스(Sparkling Bay Books), 평균 독자평점은 별 네 개 반, 아마존 내의 판매순위는 500등 정도……. 사냥꾼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에는 약간 미흡한 정보들이지요. 그런데 수십 개의 독자 서평이 붙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경험적으로 보아 이 정도의 외양을 갖춘 책들은 그저 서너 개에서 많으면 열 개 정도의 서평이 붙어 있었거든요.
게다가 거의 모든 독자서평들은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한달음에 읽었다'면서 '현대판 천로역정', '환상적인 모험담', '손톱을 뜯으며 읽게 되는 소설', '넘치는 긴박감, 깊은 의미', '한번 읽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고, 읽는 내내 긴장을 풀 수 없었다'는 식의 찬사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선뜻 들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일방적인 칭찬들이 오히려 경계심을 갖도록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격한 표현을 동원하여 이 작품을 절대 '읽지 말라'고 권하는 서평을 서너 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단호한 '읽지 말라'는 말에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즉시 주문을 넣었고 일주일쯤 지나 책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는 대부분의 독자들처럼 저도 '한달음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이 작품을 추천했던 이유와 '읽지 말라'고 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 행간에 숨어 있는 상징들을 찾는 재미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하는 소년이 여행을 떠나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목적한 것을 찾고서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야기는 이렇듯 단순합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독자들이 꼭 읽어보라고 적극 추천하는 이유는 물론, 절대 읽지 말라며 논쟁을 벌일 만한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읽다보면 그 이유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엘리아스의 지팡이」는 이야기 구조의 단순함과 쉽고 편안한 서술 방식을 바탕으로 교훈을 담은 우화 혹은 시공을 넘나드는 판타지 같은 외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주 치밀하게 구성된, 그래서 천천히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해야 하는 소설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서부터 지명 그리고 이야기의 배경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단순하게 때로는 중의적으로, 참으로 다양한 상징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마치 온라인 게임을 하듯, 저자가 숨겨 놓은 알레고리와 상징이라는 아이템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해석하는 재미에 빠져들다보면 어느새 주인공 엘리아스의 세계 속으로 푹 빠져드는 것이지요.
이 소설을 적극 추천하는 독자들은 행간에서 발견한 여러 상징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일 것입니다. 좋지 않게 평가하는 독자들의 경우는 물론, 상징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저자는 자기 작품으로 인한 논쟁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하더군요. 사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참 흐뭇한 일이지요. 자신의 첫 작품이 독자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니 무척 기분 좋은 일이겠지요.
저자는 영국과 일본의 출판사로부터 출간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 앨라배마 주에 있는 아주 작은 출판사에서 발행한 신인작가의 첫 작품이 이렇듯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작품성이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작품에 대한 판단은 온전하게 독자들의 몫입니다. 옮긴이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작품은 천천히 읽어주시길'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 간지러움과 비슷한, 어떤 아쉬움이 남는다면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야기의 표면에 드러나 있는 것보다 행간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찾아보는 것도 이 작품이 제공하는 책읽기의 또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와 포크너의 문체, C.S.루이스의 사상 그리고 J.R.R. 톨킨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 레트 엘리스는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두번째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것은 「엘리아스의 지팡이」가 지닌 중독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2001년 겨울 초입,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