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순은 충청남도 논산군 광석면, 강경평야 언저리 작은 마을 말머리에서 태어났다. 대전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새벽예배도 열심히 다녔으며, 고등학교 때는 머들령이라는 문학동인회에 가입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에 매력을 느끼며 공부했다. 한신대학교에 편입하여 안병무 교수에게서 성경신학과 민중신학을 배우고, 박봉랑 교수의 지도 아래 카를 바르트와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을 공부했다. 서구 주류 전통 신학자 바르트에게서 복음적인 신학의 깊이를 배우고, 서구 전통 신학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본회퍼에게서 신학적인 자유와 영감을 얻었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국제성경주석서를 번역하면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고 신학자였던 안병무 박사를 가까이 모시고 자유롭게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고 특권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함석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씨알사상을 배우고 익힐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보람과 사명이었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을 지냈으며, 2007년 재단법인 씨알을 설립하고 씨알사상연구소장으로서 함석헌과 그의 스승 유영모의 씨알사상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유영모·함석헌의 생각 365》,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씨알사상》, 《다석 유영모》, 《한국생명신학의 모색》, 《예수운동과 밥상공동체》 등이 있다.
이제까지의 민중운동이 지식인 엘리트가 앞장서서 선동하고 민중이 뒤따르는 운동이었다면, 삼일운동은 민을 나라의 주인과 주체로 앞세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스스로 일어서도록 호소한 민주운동이다. 지식인 엘리트가 앞장서거나 주도하지 않고 민을 주인과 주체로 앞세운 운동이며, 민이 나라를 구할 주체로서 스스로 일어선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민중운동이었다. 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떳떳한 평화운동이다. 조선왕조가 망하고 10년이 채 되지 못해서 삼일운동이 일어났으나 삼일운동을 통해서 민족의 정신과 의식은 군주적 신분적 봉건의식에서 민주의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한국사회는 군주 중심, 관官 중심의 의식에서 민이 중심이 되는 민주사회로 바뀌었다. 또한 민을 정치의 대상으로 삼는 민본 정치에서 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정치로 바뀌었다. 삼일운동을 통해서 민주공화정의 이념과 정신이 민족사회 안에서 확립되었다. 삼일운동과 관련된 문서들에서 왕과 왕조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고 왕조사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족대표들 가운데 평민 출신이 많고 고관대작을 지낸 사람도, 저명한 사람도 없었다. 삼일운동을 통해서 군주사회에서 민주사회로 확실하게 이행했고 신분제 사회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바뀌었다. 삼일운동 이후에는 한국사회에서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나 움직임이 없었다. 삼일운동은 민주정신의 근원이고 민주사회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었다. _2장 ‘삼일운동의 정신’에서, 41-42쪽
삼일독립선언서, 삼일운동, 헌법전문, 헌법 1장 1, 2조가 한결같고도 뚜렷이 보여 주는 것은 민주이념과 원칙, 민주정신과 철학이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함으로써 민이 나라의 주인과 주체임을 선언하였다. 민을 떠나서 나라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민이 곧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헌법전문은 국민이 헌법제정권자임을 분명히 밝힌다. 민이 나라의 주권자로서 자신의 자격과 책임을 스스로 규정하는 입법자가 되었다. 민은 자신의 법을 자기 스스로 만드는 자다. 민은 헌법을 만드는 자이며 헌법을 지키는 자이고 헌법을 바꿀 수 있는 자다. 민이 스스로 만든 법을 민이 스스로 존중하고 지키지 않으면 법은 아무 의미가 없다. 헌법은 민의 주권과 주체에 근거하며, 민의 주권과 주체를 세우기 위해서 존재한다. 민이 참된 주체, 참된 주권자가 되지 못하면 헌법은 존재의 근거와 목적을 잃게 된다. _4장 ‘삼일운동과 헌법전문’에서,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