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로 국가공유지에 무허가로 판잣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일을 했어. 아주 염치없는 자들을 상대한 거지. 국가의 땅에 함부로 집을 짓고 살았으면 나가라고 할 때 그동안 살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가지는 못할망정, 못 나가겠다, 정 쫓아내려면 보상금을 내놔라, 하면서 터무니없는 생떼를 부리는 자들이었어. 어떻게 감히 나라에 반항을 한단 말인가. 옛날로 치면 역적들 아니겠나.--- p.82
아직도 조폭들은 연장질을 하며 영역 다툼을 하고 있고 건설업에 뛰어들어 갖가지 이권을 챙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공무원들이나 정치인들과 형, 동생하며 지내기도 한다. 사채를 하는 자들도 수없이 많다. 이 모든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긋지긋하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세상이 곧 이 영화의 세트장이나 마찬가지였다.--- p.134
매일 업데이트되는 정치와 사회 뉴스를 읽다 보면 연재소설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소설만큼의 짜임새는 없어도 ‘실제 사건’이라는 전제는 그 이야기의 모든 허술함을 상쇄시킨다.--- p.163
화가 났다.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는 철거민들 때문이었다. 나는 저들이 좀 더 악당답기를 기대했다. 철거 용역들에게 각목을 휘두르고 경찰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돌을 던졌으면 했다. 그러나 저토록 무기력한 모습은 오히려 내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을 뿐이었다.--- p.214
고통에 찬 비명이 철거 현장을 뒤덮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처절한 광경이 이어졌다. 폭력에 도취된 철거 용역들은 사냥하듯 철거민들을 몰아갔다. 아직까지 이 싸움으로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 싸움이 거듭될 때마다 죽음 없는 시체들은 늘어나고 있었다.--- p.288
곽 서장의 명령을 받은 경찰들은 즉각 스크럼을 짜고 있던 철거민들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이곳에서 철거가 시작된 이래로 처음 행해진 경찰의 진압은 철거 용역들의 폭력보다 훨씬 무자비했다. 곤봉을 내리치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철거민들은 그저 ‘행정적인 처분’의 대상일 뿐이었다. 양심의 가책이 사라진 폭력은 철거 용역들의 폭력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p.325
철거민들은 설거지를 하거나 자신이 누운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이들이나 조폭들이나 단체 생활을 하며 늘 폭력과 맞대면하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조폭들과 섞여 있을 때 느꼈던 불온한 긴장감이나 군대 같은 분위기가 여기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칠법한 평범한 사람들의 아침만 존재할 뿐이다.--- p.337
나는 남자가 한때는 아파트에 살던 중산층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 말은 누구나 한순간에 여기까지 내몰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순간 내가 살던 세상의 이면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항상 잠재적인 수용소를 발아래에 두고 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수용소가 되어버린 이곳도 불과 몇 달 전까지는 멀쩡하게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철거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땅과 권리 따위를 걷어버리고나면, 한 편의 기괴한 SF영화처럼, 그 아래 숨어 있던 수용소가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실이 영화가 되면 내가 영화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현실에 카메라를 갖다 대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는 처음부터 이 현실이라는 세트장에 카메라를 갖다 대고 있었을 뿐이었다.--- p.345
자연이 준 재난은 인간을 뭉치게 하지만 인간이 준 재난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으니까요.--- p.361
그것도 방탄복과 곤봉과 방패 그리고 총으로 무장한 경찰특공대였다. 뉴스에서 언급한 대로 정말 ‘강력한 경찰력’이었다. 아래에서는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시 경찰들의 ‘행정적인 처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훈련받은 폭력은 철거 용역과 비교할 바가 못 됐다.--- p.393
인간들의 욕망이 힘겨루기를 하는 사이 여기는 잡초들의 차지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허무했다. 눈앞에 5층 건물이 아른거렸다. 나는 그 5층 건물로 걸어 들어갔다. 멱살잡이를 했던 남자가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철거민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재인은 내게 대단하다고 말해주었다. 삼룡은 감독님, 하고 나를 불러주었다. 눈물이 났다.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5층 건물이 사라졌다. 문득 내가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내 영화는 여기에 있었던 모든 일을 끊임없이 증언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이곳이 영원히 방치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