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각자의 등에 나 있는 지그재그 모양의 상처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읽었고, 상처를 느꼈고, 병을 전염시켰다. 어떤 날에는 등을 대고 있다가 떼어낼 때면 쩌억, 하고 소리가 났고 상처에 진물처럼 물이 흘렀다. 수는 내 등에 매달려 지그재그 모양의 상처에 혀를 댔다.---「초능력 소녀」중에서
나는 방에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서른 명이 넘는 내가 바글바글 떠들어댔고 생각이 나누어졌다. 서른 명이 넘는 내가 공부를 했고, 서른 명도 넘는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 나를 감시했고 피아노를 쳤고 엄마의 약병에서 꺼내 온 수면제를 함께 나눠 먹었다. ---「트레일러 소녀」중에서
우리는 각자의 무덤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내 무덤은 장미로 뒤덮였다. 뱀이 무덤을 휘감으며 지났고 늑대가 어슬렁거렸다. 바람이 불고 눈이 쌓였다. 계절을 건너뛰어 봄이 오면 눈이 녹았고 죽음의 기간이 끝났다. 우리는 태어나 재빨리 자랐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기차가 지나간다」중에서
상어의 이빨에 내 몸을 찢고 나온 피가 흐른다. 상어는 내 다리 사이로 흐르는 피를 혀로 핥는다. 손이 마비되며 빳빳해진다. 오그라드는 손은 손가락이 사라져 편평한 토막이 된다. 눈이 사라지고 입도 사라진다. 몸통이 얇아지고 몸에 있는 구멍이라는 구멍은 모두 막힌다. 누군가 내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다. ---「목공 소녀」중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한쪽 봉에 한 발씩 딛고 평행봉에서 일어났다. 몸의 중심이 흔들렸지만 양손을 뻗어 평행을 유지했다. 바람이 허공을 가르며 다가와 서서히 나를 통과했다. 고개를 들어 상처처럼 길게 흩어져 있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진의 생각을 헤아려보았다. 죽고 싶었고 동시에 살고 싶었을 것이다. ---「파란 평행봉」중에서
소년이 소요의 어깨를 감쌌다. 소년에게서 미묘한 냄새가 났다. 꽃향기 같기도 한 그 냄새는 차가운 바람과 뒤섞여 야릇한 냄새로 자꾸 맡아보고 싶게 만들었다. 채 다물지 못한 소년의 입가로 거품이 흘렀다. 소요는 녹색 털모자를 쓴 소년의 한쪽 팔에 어깨를 맡긴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 구름이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소년의 몸속으로 흰 알약이 스며드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내 곁에 있어줘」중에서
바다에서 나온 사람은 처음 걸음을 걷는 것처럼 모래사장 위에서 휘청거리다 서서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하얀 살결 위로 굵은 비가 떨어지고 불빛이 비춰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숨을 죽인 채 응시했다. 물미역 같은 머리칼이 앞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 나는 벌거숭이로 이곳을 향해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그녀를 위해 커다른 이불을 펼쳐 들고 어둠 속을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