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는 생물학을 공부했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워킹맘으로 살다가 십 년 넘게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도전했다. 사업의 쓴맛을 맛본 후 전업주부가 되어 초등학생과 중학생 두 아이와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엄마로 살고 있다. 일을 그만둔 뒤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을 채우고자 장르 구분 없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인문학 공동체에 발을 디뎠다. 처음에는 어영부영 니체를 읽다가 사서(四書)를 읽기 시작하면서 평생 공부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느덧 두 자녀가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고, 남편은 깊이를 더해가는 아내의 독서 리스트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지은 책으로는『공부하는 엄마들』(공저)『독학자의 서재』(공저)이 있다.
왜 나는 읽고 배우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줄줄 설명해줄 수 있는 백과사전 엄마가 되고 싶어서? 아이에게 필요한 건 척척박사 엄마가 아니라 일상을 공감하고, 같이 고민하는 엄마이다. 인문학은 나의 모자란 지식을 채우는 흙이 아니라 나의 단단한 내면을 깨트리는 망치 같은 역할을 해야만 한다. --- p.16
공자가 『논어』를 통해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인간 상호 간의 사랑인 인(仁)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효는 거창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공자는 효가 무엇인지 묻는 제자에게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한다(父母唯其疾之憂 부모유기질지우)”고 말한다. 부모를 향한 자식의 마음뿐 아니라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도 효의 개념에 포함하고 있다. 『논어』 속의 효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다. --- p.53
마음껏 커피를 마실 수 없는 내게도 아침에 갓 내린 하루의 첫 번째 커피를 마시는 설렘이 강렬하다. 그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 수 있을까.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유혹에 약한 인간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친다.『파우스트』는 괴테가 일생에 걸쳐 집필한 책으로 연금술사 혹은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 마술사에 대한 전설을 모티프로 삼았다. 파우스트는 진리와 이성을 통해 신을 대하고자 했지만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 p.71
고전은 모든 책의 원형이자 모티프이다. 단테가 『신곡』을 쓸 때 호메로스의 시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참고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전을 읽으면 다른 작품을 훨씬 깊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고전을 통해 좀 더 지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백 마디 장황한 설명보다 간결한 사자성어가 효과적인 의사표현의 수단이 된다. 권수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고전을 읽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셈이다. --- p.89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남성에 비해 억압적이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여성이 자유로 향하는 길은 경제적 자립과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업주부인 나는 고정 수입이 없고, 더구나 내 방 한 칸 마련할 형편도 되지 못한다. 그 대신 가계부를 쓰면서 우리 가족의 재정을 건전하게 관리하고, ‘자기만의 방’ 대신 내 시간을 알차게 관리하는 것,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활용하는 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다. --- p.161
알랭 드 보통은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불안과 욕망을 완전히 불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내 모습이 과거에 내가 꿈꾸던 모습이 아니더라도 인정하고, 혹은 내 친구가 성공하여 사회적 부와 명성을 손에 쥐더라도 여유롭게 축하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부러워하는 그 친구의 성취도 인생의 나선 위에 있는 한 점일 뿐이기 때문이다. --- p.207
아들러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말한다. 『탈무드』에 보면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줄 것인가”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적으로 ‘자신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자신을 찾고 싶다는 마음은 외부의 시선과 상관없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의지와 일맥상통한다. 수십 년 살아온 삶과 다른 방식의 삶을 꿈꾸면서 정작 아이들에게는 과거 자신의 모습대로 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