Георгий В. Флоровский, 1893~1979
20세기 러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고 뛰어난 정교회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오데사의 노보로시스크 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한 후, 1920년에 대학의 비상근 강사로 위촉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프라하로 망명하게 되고, 그곳에서 게르첸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신학 분야에서 플로롭스키는 뛰어난 독학자였다.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했는데도, 교부 연구에 매진해 교부학자로 명성을 얻었다. 점차 형성된 그의 세계관은 당시 해외로 망명한 종교적 인텔리겐치아 대다수와는 달리 세속 철학이 아닌 신학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잠시 ‘유라시아주의’와 관련을 맺기도 했는데, 서구와 서유럽 철학에 대한 유라시아주의의 조심스러운 부정적 태도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1926년, 갓 생겨난 파리 신학교의 교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2년에 서유럽을 총괄하는 대주교의 성직을 받게 되어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 활동하며 ≪러시아 신학의 여정≫(1937)을 출판했다.
1939년 여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목격했다. 전쟁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에 머물렀다가 프라하를 거쳐 마침내 파리로 돌아왔다. 이미 교부학 강좌를 다른 교수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윤리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1948년에 미국의 대주교 페오필의 초청으로 뉴욕으로 이주해 성 블라디미르 신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후에는 학장직을 맡았다. 학장으로 있었던 1948년부터 1955년 사이 신학교의 개혁에 열성적으로 착수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동시에 권위를 인정받은 정교회 신학자로서 유니온 신학교, 콜롬비아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고 논문을 저술하는 등 미국 대학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브루클린에 있는 성 십자가 그리스정교회 신학교에서도 강의했다. 은퇴 후에도 프린스턴 대학에서 방문 교수로서 강의를 계속했다. 학자와 교수로서 활동하는 동안 수많은 예배를 집전하고 설교를 하는 등 정교회의 충실한 사제이자 영적 안내자로서 부지런히 활동했다. 1979년 8월 11일 프린스턴에서 생을 마감했다.
허선화는 고려대학교 대학원 노어노문학과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전공으로 택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성서의 상호 텍스트성에 관한 석사 논문을 썼다. 이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 러시아문학 연구소(일명 푸시킨 연구소)에서 도스토옙스키 연구의 권위자인 발렌티나 베틀롭스카야(В. Е. Ветловская)의 지도를 받아 도스토옙스키 미학의 여러 문제들을 정교회 콘텍스트 속에서 연구한 박사 논문을 썼다. 귀국 후에는 고려대학교와 부산대학교에서 러시아 문학과 역사 등을 주로 강의해 왔다. 러시아의 기독교 문화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과 함께 ‘러시아기독문화 연구회’를 만들어 매달 독회에 참여하고 있으며, 공동으로 ≪바흐친과 기독교: 믿음의 감정≫(부산대학교 출판부, 2009)을 번역했다. 러시아정교회 사상가 알렉세이 호먀코프의 ≪교회는 하나다≫(지식을만드는지식, 2010)를 번역했다.
기독교 신자로서 학문과 신앙의 통합에 관심이 많다. 도스토옙스키는 서구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기독교 작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그의 작품들에 나타난 심오한 기독교적 주제들을 연구하려 한다. 이 주제와 연관해 그동안 발표한 논문들로는 <조시마 장로의 형상에 나타난 정교 이콘화 특성의 연구>, <도스토옙스키 창작에 나타난 미 인식의 문제>, <도스토옙스키 후기 소설 속의 그리스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타난 신 인식의 변화>, <도스토옙스키 후기 소설 속의 수도원 공간> 등이 있다.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다양한 인간 심리의 양상에도 관심이 많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나타난 자기 비하, 공상, 공포, 수치심 등의 심리적 테마를 다룬 논문을 쓴 바 있고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를 더욱 확장할 계획이다. 궁극적으로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통한 문학과 신학, 심리학의 통합적 연구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