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의 이탈리아 천재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잔 베르니니의 이야기다. 다른 시대의 사람인데도 미켈란젤로와 비교될 정도로 위대한 예술가로, 르네상스 이후의 로마는 베르니니가 지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대단한 건축물과 조각을 남겼다.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는 8살에 이미 교황 바오로 5세 앞에서 훌륭한 작품을 선보였고, 이후 거처를 로마로 옮겨서 교황의 빵빵한 지원 아래 개인과외로 조각 수업을 받았다.[…] 교황의 보호 아래 있던 베르니니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작업은 열심히, 사생활은 문란하게![…]
교황은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 나서야 사건에 개입했다. 물론 교황도 이 사건의 전말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무척이나 아끼는, 그리고 로마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베르니니를 처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머리를 굴렸고, 결국 잘 해결했다.
교황의 판결! 코스탄자는 간통죄로 감방행, 코스탄자의 얼굴에 난도질을 한 베르니니의 하인은 살인미수죄로 감방행, 동생 루이지는 행방불명이므로 어쩔 수 없음. 물론 교황의 부대가 루이지를 몰래 쫓아가서 죽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아끼고 아끼는 베르니니에게도 중형을 내렸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작업에 몰두하라는 뜻으로 당시 로마에서 제일 예뻤다는 22살의 처녀 카테리나 테치오와 결혼시켜버린 것이다. 베르니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형량을 받아들였고, 자식을 11명이나 낳았으며, 교황의 사랑 아래에서 40년을 더 일하며 당대 최고의 건축물과 조각상을 남겼다. ---「PART 3. 미술사 속 사랑과 전쟁」중에서
밀레이는 그림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실제 강가에 나가서 배경을 그린 다음, 작업실로 돌아와 모델 리지 시달을 그려 넣었다. 시달 역시 보다 현실감 있는 포즈를 위해 욕조에 물을 붓고 누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차가운 물에 오랜 시간 누워 있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밀레이는 욕조 아래에 램프를 켜서 온도를 유지했다. 이 과정은 몇 개월 동안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램프가 그만 꺼져버리고 말았다. 물이 계속 차가워졌지만 밀레이를 방해할 수 없어서, 시달은 말 한마디 못 한 채 몇 시간을 얼음장 같은 욕조 속에 누워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밀레이는 정신없이 작업하느라 물이 차가워졌는지도 몰랐다. 작업이 끝나자, 시달은 바로 감기와 오한 등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물론 시달은 “물이 차가워요”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달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 순간, 자신은 최고의 모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화가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을 모델인 자신이 이해하고 따라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모델 정신이다.
리지 시달은 화가들의 모델로 활동하면서부터는 옷도 항상 일상에서 입기엔 화려한 것들로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화가가 자신을 부르면 언제든지 바로 모델로 서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PART 4. 화가와 모델」중에서
우선 빈센트 반 고흐의 다른 작품을 보면 색이 아주 진하고 대비가 짙으며, 물감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무겁다. 반 고흐를 대표한다는 열정의 노란색도 활활 타오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의외로 부드러운 파스텔 톤이 맴돌뿐 아니라 같은 시기의 작품에서 많이 사용한 두꺼운 붓질도 적은 편이다.[…]
두 자화상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는데도,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이유는 빈센트 반 고흐가 『수염이 없는 자화상』을 어머니에게 드릴 생신 선물로 그렸기 때문이다. […]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걱정을 잘 알고 있었던 빈센트 반 고흐였기에, 어머니를 위해서 편안한 모습을 담은 자화상을 그린 것 아닐까? “어머니, 저 많이 아프지 않아요.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불효자를 용서해주세요.” 그런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PART 6. 행복과 치유의 매개체, 미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