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경남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다 KBS 극본 공모에 당선되어 100편 가까운 단막극을 썼다. 늘 방송에 부적합한 내용을 쓴다는 평가에 의기소침하다 아예 방송으로 만들 수 없는 이야기를 해보자고 작정하고 쓴 첫 소설 『선량한 시민』으로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에드거 앨런 포와 아서 코난 도일의 팬이며, 공포영화광답게 살인, 죽음, 공포라는 소재에 언제나 매료되어 있다. 비극적인 현대사를 배경으로 대를 이어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다룬 두 번째 소설을 완성했으며, 예수의 시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연쇄 살인을 소재로 세 번째 소설을 준비 중이다.
‘지금 등을 확 떠밀어버리면 저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 갑자기 배 속이 꿈틀했다. 왜 그런 충동이 들었는지는 그때도, 그 이후에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충동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은주는 갑자기 오금이 저려오면서 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다. 입안까지 바짝 말랐다. 은주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 p.48
공포보다 은주를 더욱 사로잡았던 것은 놀라움이었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주는 놀라움. 그것이 어떤 뿌듯함이나 자랑스러움은 결코 아니었지만 분명 공포도 아니었다. 죄책감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형태의 놀라움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스스로에게 살인자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p.53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것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정치한 인과관계에 의해 사건이 일어나고 마무리되는지 창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인생에는 복선도 플롯도 없다. 성격은 충동에 의해 무너지고, 기억은 소망에 의해 왜곡된다. 인생은 무질서한데 왜 소설 속 이야기는 그토록 질서 정연해야만 하는가. --- p.76
현실의 범행은 너무나 우연적으로 이루어지고, 범인은 허술하기 짝이 없고,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과학 선생 사건만 해도 그랬다. 창수는 지금도 가끔 과학 선생의 꿈을 꾸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다. --- p.77
동기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창수는 의심스러웠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고, 엄청난 일에는 그만큼 엄청나고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착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때로 절박한 심정이 되곤 하지만, 그 절박함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가 때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그것을 동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 p.93
생각해보니 정말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어떻게 저 목격자를 처치했겠는가. 동시에 이렇게 쉽게, 그것도 두 번이나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 이어 경찰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관통하며 지나갔다. --- p.120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의 껍질 아래 비인간적인 공격성과 철저한 이중성,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창수는 거의 전율을 느꼈다. 그 전율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충격과도 유사했다. 평범한 말만 골라 하면 할수록 은주는 더 신비롭게 보였고, 은주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평범한 인간인 듯한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 p.133
“그건 왜 물으세요? 제가 무슨 원한이라도 있어서 모함했을까 봐서요?” “그런 이유라도 있어야 말이 되죠.” “형사님, 형사님은 세상 모든 일이 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세상 모든 일이 내 관심사는 아니죠. 나는 범행에 대해 말이 되는 해답을 찾을 뿐입니다.” “그럼 이은주가 범인이 아닌 게 맞잖아요. 도무지 말이 안 되니까.” --- p.157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은주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 가공의 연쇄 살인범이 현실로 나타났는지, 자신은 왜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는지, 사람을 죽이고도 왜 아무렇지도 않은지 이해하려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뿐이다. --- p.195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 복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엄청난 일은 사소한 일상의 분노로 인해 촉발될 수 있다. “우리는 왜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질문은 어리석다. 인간은 본래 사소한 것에 분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관습을 철저하게 깨고 있다. 소설의 첫 장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고, 심지어 진범은 잡힌다는 추리소설 특유의 깔끔한 결말마저도 거부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치밀한 스토리와 연속되는 반전,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이 주는 충격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책을 덮으면서 ‘과연 이성적 인간을 표방하는 우리가 현실의 인과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갖게 될 것이다. - 강희진(소설가)
『선량한 시민』은 평범한 여성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연쇄 살인 행각과 이 연쇄 살인이 폐쇄적 마을에서 하나의 ‘놀이’로 희화화되는 과정을 정밀하게 파고든 추리소설이다. 반전을 거듭하다 결국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세계문학상 심사위원단(이순원, 신승철, 정은영, 구경미, 김도언, 정이현, 김미월, 김석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