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KBS 역사스페셜
DVD

KBS 역사스페셜

[ 100 DVD ]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판매가
1,000,000
할인가
900,000 (10% 할인)
구매 시 참고사항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매일 2002년 01월 01일
시간/무게/크기 크기확인중

제품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DVD/ Blu-ray 구매시 참고 사항 안내드립니다.
※ 4K블루레이, 3D 블루레이 재생 관련 안내
1) 4K UHD 디스크는 대용량의 데이터 전송이 필요하므로 4K전용 플레이어를 사용하셔야 합니다. 더불어 플레이어 소프트웨어 최신 버전의 업데이트, 대용량 케이블 사용이 필수입니다.
2) 3D 블루레이는 전용 플레이어와 3D 지원 TV를 통해서만 재생 가능합니다.

※ 아웃케이스/구성품/포장 상태
1) 제작/배송 과정에서 경미한 아웃케이스 주름, 모서리 눌림 및 갈라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품을 원하실 경우 미개봉 상태로 문의 부탁드립니다.
2) 스틸북 케이스 제작 과정에서 기포 혹은 경미한 인쇄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3) 렌티큘러 스틸북의 경우, 보호필름이 붙어 판매되기도 합니다. 보호필름 손상에 의한 교환/반품은 불가합니다.
4) 본품 보호를 위해 노란색의 카톤 박스로 재포장한 경우, 카톤박스 손상에 의한 교환/반품은 불가합니다.
5) 아웃케이스/구성품/포장 상태 불량에 의한 교환/반품 신청시 불량 확인을 위해 개봉 시의 동영상을 요청할 수 있으며, 동영상이 없는 경우 교환/반품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 디스크 재생 불량
1) 기기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재생 불량 현상에 대해서는 반품/교환이 불가하니 최신 소프트웨어로 업데이트된 DVD/BD 전용 기기에서 재생하실 것을 권유해 드립니다.
2) 정전기와 먼지로 인해 재생이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디스크를 마른 천으로 닦으시거나, DVD 클리너 등 전용 제품을 이용하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3) 일부 PC 연결형 ODD의 경우 호환 상의 문제로 정상적인 디스크도 재생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독립형 전용 플레이어 사용을 권장드리며, ODD 사용으로 인한 재생 불량의 경우 교환 시에도 동일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디스크 외관 불량
디스크에 미세한 잔 흠집이 남아있거나 인쇄 면이 깨끗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며, 상품의 불량이 아닙니다. 단, 재생에 이상이 있는 경우에는 불량으로 인한 반품/교환이 가능합니다.

※ 교환/반품 안내
1) 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 요청 시에는 불량 확인을 위해 개봉 시의 동영상을 요청할 수 있으며, 동영상이 없는 경우 교환/반품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관련 사진과 동영상 및 재생 기기 모델명을 첨부하여 첨부하여 고객센터에 문의 바랍니다.
2) 사양 오인지, 오 구매, 변심 사유로의 반품은 제품 개봉 전에만 운임비 부담 후 처리 가능합니다.
3) 스틸북 한정판, 초회 한정판의 경우 제작 수량이 한정되어 있고, 택배 이동 과정에서의 손상이 발생하면, 재 판매가 어려우므로 신중한 구매 선택을 부탁드립니다.
4) 한정판 상품의 변심, 오구매로 인한 반품은 회송된 상품의 상태 확인 후 진행이 가능합니다. 택배 이동 중 파손이 발생하지 않도록 완충 포장을 부탁드립니다.

구성 목차 보이기/감추기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91편: 토우 - 신라인의 사랑과 진실
1. 흙으로 만든 인형

토우란 흙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토우는 고대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만 존재하는, 외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독자적인 신라만의 문화이다. 토우의 형태는 단순하지만 그 표현이 지극히 사실적이라서, 고대 왕국 신라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 토우의 사랑 나누기

신라인들의 성에 대한 솔직한 모습이 토우에 그대로 드러나있다. 사랑을 나누고 있는 토우 남녀의 모습들은 다양하고 노골적이다. 성을 은밀하고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일상 속에서 익살과 해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기묘사가 강조된 남성토우와 여성토우의 모습은 번창을 바라는 주술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3. 연주하며 춤추는 토우

악기를 연주하는 토우, 춤추는 토우, 노래 부르는 토우 등의 모습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신라인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특히, 가야금과 비슷한 악기를 연주하는 토우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는데, 토우는 신라에 가야금이 전해지기 이전에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신라만의 전통악기가 있었다는 것인가.


4. 농사짓고 사냥하는 토우

신라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았는지도 토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신라의 농경과 수렵, 어로 생활 등 일상의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각종 토우들의 모습을 통해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짚어본다.


5. 이색 동물 토우

원숭이, 코끼리 등 우리 나라에는 살지 않았던 동물들의 모양을 한 토우들이 있다. 호주 대륙에서 볼 수 있는 흰개미핥기라는 동물도 있다. 어떻게 한반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이런 이색 동물들이 토우로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6. 다산과 풍요의 기원

토우는 살아 생전에 행복했던 이야기와 사후에도 그 행복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다. 뱀, 개구리, 거북, 용, 가면 등의 토우들은 나름의 소망들을 표현하고 있다.


7. 토우와 토용

토우에는 신라만의 독특한 정서가 흐르고 있다. 하지만 통일신라 왕족의 무덤에서 발견된 토우는 기존의 토우와 다른 모습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면서 그 의미와 모습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통일신라의 토우는 토용으로 분류한다. 토우와 토용은 생김새 뿐만 아니라 만드는 방법도 크게 다르다.

69편: 로마유리 2000년 전 신라에 오다
1. 황남대총의 유리는 수입품이었다.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용기는 모두 열점. 남자 주인공의 머리맡에서 출토된 유리컵에는 물결무늬가 장식되어 있었다. 유리는 당시 신라에서 생산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설령 가지고 있었더라도 세공할 수 있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유리 유물들, 그 대부분은 외래에서 수입해 올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고대인들이 유리들을 어디서 수입한 것일까?


2. 유리는 로마로부터 왔다

경주 왕릉 지구에서 출토된 유리목걸이의 중심에 박혀있는 작은 유리구슬에는 상상하지 못한 그림이 숨어 있었다. 하얀 얼굴에 눈이 크고, 입술을 붉게 칠한 사람의 얼굴, 구슬 안에는 모두 네 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목걸이를 통해 유리산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3. 이스라엘 현지 취재

꽃이 만발한 나무 위로 흰 새가 날고 있고, 그 아래 짙게 화장한 낯선 이들이 보인다.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 정교한 그림이 겨우 1.5cm밖에 되지 않는 유리 구슬에 그려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그림이 그냥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의 가는 유리막대를 일일이 오려 붙여서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유리의 본산지 로마에서 유리유물을 둘러싼 의문들을 풀어본다.


4. 초원의 길

로마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신라는 그 반대편, 동쪽의 끝에 있다. 이 두 나라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로마에서 유행하던 유리병이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그 전파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로마에서 유리가 직수입될 수 있었던 것일까?


5. 바다에서 이루어진 교류

이미 신라시대 이전 한나라시대부터 바닷길을 통하여 인도와 동남아의 구슬이 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 유리가 신라로 전해지기 훨씬 전인 한나라 시대부터 바닷길을 통해 세계를 잇는 해상 실크로드가 존재했던 것이다. 2000년 전, 한반도는 세계를 향해 한껏 열려있던 사회였다.



99편: 기생 홍랑의 지독한 사랑
1. 홍랑의 연시

2000년 11월, 조선 중엽의 대표적인 연시로 꼽히는 홍랑의 시 원본이 공개됐다. 이 서첩에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발문이 있는데 그는 이 시의 내용과 표현이 “보배”와 같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홍랑의 시조는 우리 문학사에서 아름다운 연시로 손꼽힌다.


2. 홍랑의 연인 최경창

홍랑이 사랑했던 연인 최경창은 조선 선조 때의 시인으로, 당대 문인이였던 송강 정철과 교류하면서 조선 중기 8대 문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또한 율곡 이이는 최경창의 시를 가르켜 '청신준일'하다고까지 평할 정도였다.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확실치않은 홍랑과 그녀의 시가 조선 중기의 것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빼어난 시인 최경창과의 사랑이야기가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에 대한 일화는 조선시대 기생들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조선 해어화사’에 소개되어 있다.


3. 만남과 첫 번째 이별

두 사람의 행로를 추적할 수 있는 기록은 최경창이 써 놓은 서첩의 서문이다. 최경창은 일찍이 탁월한 문장과 음악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과거 급제후 그는 함북 경성에 평사로 부임한다. 시와 풍류를 아는 젊은 관리 최경창과 재색을 겸비한 경성의 이름난 기생 홍랑. 정신적인 교감이 가능했던 그들은 사랑에 빠지지만 최경창의 경성에서의 임기가 끝나 이별을 하게 된다.



4. 사랑은 파직을 부르고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병으로 몸 져 눕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이야기가 조정에 들어가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다. 때는 명종비의 죽음으로 국상기간, 더욱이 동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이 자리잡던 시절이라 이들의 행각이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5. 죽음으로 인한 이별 그 후

홍랑의 일로 파직 당한 뒤,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만다. 이승에서 그들의 사랑은 신분의 차이와 죽음으로 계속될 수 없었다.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시작한다. 홍랑이 죽고 난 뒤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한 집안 사람으로 여겨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6. 재색을 겸비했던 조선의 기생

조선시대 기생은 ‘여악’이라 불렸다. 그들은 주로 양반 계층과 어울려야 했던 만큼 각종 악기와 가무, 문장을 배웠다. 관동지방 기녀들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을 잘 불렀고, 함흥의 기녀들은 용비어천가를 잘 읊었다고 한다. 비록 천민 신분이었지만 기생들은 예술보존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7. 홍랑의 후손을 찾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누구일까? 취재진의 추적결과 최경창의 서자 최즙을 찾을 수 있었다. 그 후손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서른 네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불과 6개월 남짓.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 뜨거움은 400년의 세월에도 식지않고 후대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45편: 외교비사 - 서희는 거란 80만 대군을 어떻게 물리쳤나
1. 호전적인 전쟁부족, 거란

내몽고 자치구에 속한 중국의 작은 도시 임동. 이곳에 세워진 상경궁터는 그 거대한 규모로 발굴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적 가운데 큰 도로가 9개, 양쪽에는 하수도도 깔려 있었다. 기마 민족이었던 거란은 무기, 군체제, 마술 등에도 능한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정복왕조를 꿈꾸며 요녕에 세운 '백탑'은 지금도 이곳의 상징물이다. 소손녕은 이곳에서 제의를 치르고 고려를 향해 출병을 단행한다. 그 명분은 거란의 영토인 ‘압록강유역’을 고려가 침범했다는 구차한 트집에 불과한 것이었다.


2. 거란의 친선을 거절한 고려

왕건 25년에 일어난 한 사건은 거란거병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당시 거란은 낙타 50필과 사신을 고려에 보내 친선을 요구한다. 그러나 왕건은 사신을 죽이고 낙타를 다리에 매달아 굶겨 죽인다. 이것은 전쟁을 불사한 조치였다. 고구려의 계승의식이 투철한 고려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이후 끊임없이 거란을 적대시하고 북진정책을 고수했던 것이다. 이에 거란은 고려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출병을 감행한다.


3. 서희의 국제감각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에서 고려를 구해낸 사람은 서희이다. 그는 호족중심의 관료들을 견제하기 위한 신진세력으로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올랐다. 그리고 22세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검교 병부상서’라는 벼슬까지 얻는다. 이런 경력은 그로 하여금 국제관계를 꿰뚫는 혜안을 키워 주었다.


4. 안융진 전투와 거란의 고민

서희의 담판은 전세 변화와 관계가 있다. 거란 침입 한달 후 두 군대는 안융진 전투에서 교착상태에 빠진다. 고려군의 검차 앞에서 거란의 기마군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 속도전에 강하고, 광활한 대지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거란의 특성이 산악 지형인 고려에서 통하지 않자 소손녕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희는 담판을 걸어왔다.


5. 거란이 태도를 달리한 이유

고려의 땅을 뺏으러 온 거란은 담판이후 오히려 땅을 내주고 선물까지 바친다. 단지 전장에서의 전세가 바뀐 것만으로 거란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거란이 태도를 달리한 또 다른 이유는 송나라와의 대립관계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거란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를 틈타 송은 거란을 공격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서희는 거란침입의 본래 목적이 고려와 친교하여 송을 견제하는데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6. 거란과 친교 후 고려와 송의 관계

송과 단교한 뒤에도 고려는 송과 문화교류를 끊지 않았다. 당시는 거란, 송 그리고 고려와의 힘의 균형을 팽팽히 유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송나라로서도 고려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국제관계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용하여 실리외교를 편 서희의 담판은 강대국사이에서 고도의 외교술을 요구하는 요즘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귀감이 되는 사례이다.
60편: 풍납토성 지하 4미터의 비밀
1. 풍납토성의 말의 뼈 유물

풍납토성 성벽 내 한 아파트 공사현장. 이곳에서 이제까지 발굴이 흔치 않았던 백제초기의 유물과 유적들이 다량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이목을 끈 것은 10마리 가량의 말 뼈였다. 그 당시 가장 귀하게 여겨지던 말의 뼈가 10구나 발견된 이곳은 과연 어떤 유적지일까.


2. 토기에 새겨진 대부

발견된 유물 중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유물에는 대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백제에는 대부가 없다. 그것은 고구려나 신라, 중국에서 쓰던 관직의 명칭이었다. 이 백제토기편의 발견은 기록에서 누락된 백제의 실체에 한발 더 다가가는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3. 백제초기의 모습 재현

지난 1997년 풍납동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백제의 유물은 이제까지 좀처럼 발굴 할 수 없었던 백제초기의 유물이었다. 그 중에 기와의 발견이 가장 학계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문양으로 보아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백제초기의 기와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와는 오직 왕궁과 관청, 절에서만 사용되는 것이었다. 이는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중심성이었음을 말해준다.


4. 왜 석성이 아니라 토성일까?

풍납토성은 석성이 아니라 토성으로 지어졌는데 그 의문에 대한 단서는 중국에 있다. 중국의 축성술이 백제에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중국 하북성에는 기원전 3세기 무렵 지어진 연나라 토성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데 풍납토성의 건축술에서도 이와 같이 흙을 한 층씩 다져나간 판축기법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5. 풍납토성, 비밀을 벗다.

유적지와 유물을 통해 복원해 본 풍납토성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런 규모로 성을 지으려면 105만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고 이는 백제가 초기에 변변한 성곽조차 없었다는 기록을 뒤엎고 강력한 고대 국가였음을 증명해준다. 숨겨졌던 풍납토성 유적지의 발굴은 한국초기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온 것이다.


6. 지하 4m의 비밀

고구려에 의해 폐허가 된 채 버려졌던 위례성. 이번에 발굴된 유적들은 지한 4미터의 땅 속에 있었다. 한때는 분명히 한 도시의 번성했던 도읍지로 사람들이 붐볐을 지표면이 어떻게 지하 4미터의 땅속에 묻히게 된 것일까. 1500년 동안 백제의 초기역사가 완전히 잊혀졌던 이유는 한강으로 인해 쌓인 4미터 높이의 퇴적층에 있었다.

19편: 진주대첩, 3천이 3만을 어떻게 이겼나
1. 패배자 일본의 분노와 치욕

일본은 진주전 참패에 분노하였다. 히데요시는 2차전을 지시하고, 진주대첩 승리의 주역인 김시민 목사의 목을 베어 오도록 명령하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김시민 목사를 빗댄 인물이 일본 문학에 등장시키면서 진주대첩에 패배한 그들의 치욕을 풀고 있다.


2. 조총과 승자총통

진주성 전투시 일본은 위력적인 신식 무기 조총을 사용했다. 이에 비해 조선군의 주무기는 창과 활이었다. 하지만 조선군에게는 조총에 대응할만한 승자총통이 있었다. 일본의 조총을 이긴 조선의 승자총통의 복원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3. 진주성의 무기들

왜군은 전투 4일째부터 새로운 장비를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당시 진주성 안에는 왜군의 뛰어난 장비에 대응할만한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형 화포인 현자총통과 독창적인 시한 폭탄인 비격진천뢰도 등의 무기는 진주성을 지키는 일등 공신이었다.

4. 조선의 요새 진주성
진주성은 그 남쪽에는 남강이, 서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성의 북쪽에는 적의 침입을 막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진주대첩의 요새 진주성을 탐방한다.

5. 고도의 심리전
전쟁에는 전투 뿐만이 아니라 심리전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군들은 다양한 심리전으로 조선군을 동요 시키려 했지만 먹히지 않았고, 오히려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고도의 심리전은 왜군을 혼란시켰다. 김시민은 보잘 것 없을 것같은 피리소리도 동원하였다.


6. 승리의 주역 김시민과 민간인

전투의 마지막 날, 새벽에 위장퇴각을 한 왜군은 곧바로 돌아와 총공격을 가했다. 성안의 민간인들은 김시민의 지휘 하에 왜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 붓는 등 사력을 다했고, 성안의 기와나 돌, 우물까지도 거의 바닥이 났다고 한다.

57편: 제주에 천년 왕국이 있었다
1. 탐라국의 실체가 있다

1996년 제주시에서 토지구획사업을 실시하던 중 드러난 제주도 삼양동 마을유적에서 대규모의 집자리와 각종 시설,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곳에서 발견된 거주지만 250여 개, 시설물도 제법 규모 있게 갖춰 있었다. 이 발견은 제주도가 낙후된 문화생활을 영위했을 거라는 그 동안의 추측을 깨고 오히려 육지보다 선진적인 문화를 가졌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2. 일찍부터 한반도와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삼양동 마을 유적은 지난 1974년 발굴된 충남 부여 송국리의 마을 유적과 형태가 비슷하다. 또한 제주지역의 토기 역시 전남 해남 군곡리 일대에서 유행하던 토기와 비슷했다. 이는 제주도가 철기시대부터 열린 바닷길을 통해 한반도 전역의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3. 선진적인 철기문화의 소유

철이 생산되지 않는 제주에서 철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일찍이 2세기경 제주도에 철기문명이 들어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 탐라가 현지발생적 문명이 아니라 북쪽에서 유입된 민족이 새로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4. 원거리 교역과 중개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탐라국의 교류는 한반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주도의 위치는 북쪽으로 한반도, 서쪽으로 중국, 동쪽으로 일본, 남쪽으로는 대문과 일본 오끼나와 열도가 있다. 다시 말해 제주도는 동아시아의 정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점을 이용, 중개무역을 통해 탐라국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당당한 해양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5. 교역의 필수품, 탐라의 배

섬나라 교역의 필수품은 단연 배인데 그 중에도 탐라의 배는 독특했다. 덕판배라고 불리는 제주 전통배는 뱃머리에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덧붙였는데 이는 제주 해안을 드나들 때 암초에 부딪혀 뱃머리가 잘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덕판배는 작은 탐라가 강대국들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디딤돌 같은 것이었다.


6. 탐라국의 외교관계

삼국통일 전까지 탐라국은 백제와 우호 관계를 맺는다. 한편 신라와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경주황룡사 9층 탑으로 알 수 있다. 이 탑의 각 층은 신라가 경계해야 할 9개의 적을 상징하는데 그 중 4층이 탐라를 의미한다. 탐라국은 소구의 필수인 탁월한 외교력도 겸비했던 것이다.

82편: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의 비밀
1. 최고를 자랑하는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 있어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 못하는 구조이다.


2. 전략적 요충지

5세기 후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곳이 보은 일대, 삼년산성이 세워진 지
점이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보은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에게 있어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삼년산성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은 현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3. 난공불락의 요새

산성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대결하던 시대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산성이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견고한 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삼국은 성을 쌓은 일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겼다. 취재팀은 삼년산성을 조사하면서 여러 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결코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4. 백제 성왕을 죽이다

삼년산성을 세운 지 100여 년 뒤, 삼년산성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신라의 통일전쟁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바로 삼년산성 출신의 한 장수가 백제 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백제의 왕을 역사상 크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한 장수가 죽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삼년산성의 역할과 삼년산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진흥왕 15년.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로 돌아가본다.


5. 신라의 대역사, 삼년산성

3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성, 성을 보수할 때 장정 3천 명을 동원했던 성, 신라는 어떻게 이런 대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486년 신라는 삼년산성을 개축하면서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했다.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에 동원한 군사력이 30만 명, 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 명이 채 안되었음을 놓고 볼 때 보은의 삼년산성을 축조하면서 3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공사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는 삼년산성을 통해 두 가지 목표를 이루어낸다.


6. 200년을 앞선 신라의 통일 행보

삼년산성을 지은 200년 후, 신라는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삼년산성의 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와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백제 사비성을 향해 진군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비성을 함락 시켰다. 그로부터 5일 뒤,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은 축하행사가 한창이던 사비성을 뒤로하고 삼년산성으로 향했다.

81편: 발굴! 스티코프의 비밀수첩, 김구는 왜 북으로 갔나?
1. 쩨렌찌히 스티코프

스탈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스티코프는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는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측 대표였고,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였다. 취재팀은 러시아 방문을 통해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한 권의 수첩을 발견했다. 북한의 실권을 쥐고 있던 스티코프가 직접 기록한 가상 통일정부 내각 명단이었다.


2.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

스티코프의 수첩 속에 유독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김구이다. 당시 38선 이남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김구는 민족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소련으로서는 무척 껄끄러운 정치인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스티코프는 왜 백범 김구에게 주목했을까. 1948년 4월 평양에서는 남북연석회의라는 이름으로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회담에 김구가 참석했던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남과 북이 분단되기 이전인데, 백범 김구가 참석한 남북연석회의는 과연 어떤 회담이었을까.


3. 한반도 상황

일제시대, 김구는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는 좌우합작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임시정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좌우 대통합을 이룬다. 김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연안에서 활동중인 또다른 좌파의 독립운동세력과의 합작을 추진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독립운동 세력이 하나로 힘을 모았지만 그 힘을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갑작스러운 해방을 맞게 된다. 김구는 예상치 못한 해방을 두고두고 안타까워 했고, 한반도의 운명은 해방의 감격에 젖어있는 동안 또 다른 비극 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4. 북행 길에 오르는 김구

조국의 위기상황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타결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과정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김구는 사전준비를 위해 측근들을 북으로 먼저 보낸다. 그리고 통일을 위해 북행 길에 오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학생들과 시민 4-500명이 김구의 북행 길을 막기위해 몰려들었고, 출발은 계속 지연되었다. 김구는 탈출을 시도한다.


5. 남북연석회와 4김 회의

불투명했던 김구의 입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남북회담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4김 회담은 남북의 정치 지도자들이 만난 실질적인 회담이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입장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회담이었다. 그리고 4개항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6. 약속의 결렬

북으로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통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돌아온 김구. 그러나 5.10총선으로 1948년 남한 단독 정부인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다. 결과적으로 남북연석회의는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김구가 북한정부에게 이용당했다는 의견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남북연석회의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66편: 고구려비가 중원에 서 있는 까닭은?
1. 중원 고구려비의 해석

중원 고구려비는 발견 당시부터 워낙 마모상태가 심해 그 글자를 다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발견 이후 학계에 일제히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후 더 이상의 연구가 진척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중원 고구려비의 재판독 작업에 들어갔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비문 해독을 위해 적외선 촬영시도 했다. 그리고 그 동안 읽어내지 못했던 글자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

중원 고구려비에는 삼국사기가 차마 밝힐 수 없었던 우리 고대사의 기록이 실려있었다. 특히,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이 담겨있었다.


3. 고구려의 남진과 중원 고구려비

고구려 역사상 가장 전성기였던 광개토대왕이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과시했다면, 장수왕은 정치력을 기반으로 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굳혔다. 장수왕은 국내성에서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남진을 시작한다. 고구려의 이런 적극적인 남진과 중원 고구려비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4. 삼국이 탐내는 지역, 중원

충주는 삼국이 모두 탐내는 지역이었다. 고구려는 이곳에 국원성을 설치해서 남진기지로 활용했고, 신라는 이 지역을 장악했을 때, 고구려 지역과 백제 지역을 다스리는 중심지인 중원경을 설치한다. 그만큼 이 지역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이 자리에 중원 고구려비를 세웠다. 그렇다면 지금의 충주인 이 중원이 왜 이렇게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잡은 것일까?


5. 고구려의 남진기지, 중원

전략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 중원. 한반도로 남진하고자 했던 야심을 이루기 위해 고구려는 중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그 비밀은 충주지방에서 많이 나는 돌 안에 있다.


6. 고구려의 남하

경북 순흥에는 고구려식의 무덤이 있다. 또한 이 순흥 고분의 벽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림들이다. 기록에는 고구려는 경상북도 순흥 지역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고구려는 한반도의 어느 지역까지 남하를 했던 것일까?

29편: 5천만자의 하이테크, 팔만대장경
1. 제작과정

대장경판의 목재는 뻘밭에 3년 간 묻었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벌목한 나무는 오래 방치해야 숨이 죽는데, 자연상태로 놓아두면 갈라지기가 쉽지만, 뻘에 묻어두면 갈라지지도 않으면서 나무 결도 삭혀져 판각에 더없이 좋은 목재가 되기 때문이다. 통나무는 경판크기로 다듬어져 판각에 쓰인다.


2. 제작기간과 규모

1-2m짜리 통나무 한 개당 가능한 목판 수는 대여섯 장, 따라서 8만여 장의 경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통나무 만5천 개 이상이 필요하다. 또한 필사가들은 경전을 일일이 베껴 써야 했는데 하루에 한 사람이 천 자 정도 쓸 수 있다고 가정하면 5천만 자를 전부 쓰는데 필요한 연 인원은 5만 여명이다. 여기에 한지제작과 판각, 경판의 옻칠 그밖에 내용 교정과 구리 장식 만들기 등 제작에 동원된 인원은 엄청나다.


3. 제작 배경

팔만대장경의 경판 하나하나, 글자 한자 한자에는 고려의 총력이 담겨져 있다. 이 경판이 만들어지던 때는 고려가 몽고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다. 몽고는 당시 아시아 대륙 거의 전역을 석권했던 신화적인 정복 국가였다.


4. 대장경의 판각지

남해는 진주 아래쪽에 있는 섬으로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당시 몽고는
육지의 거의 전역을 휩쓸고 다녔지만 남해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또한 남해는 물길을 통해 목재를 운반하기도 쉬운데 그 장소로 꼽히는 곳이 관음포이다.


5. 해인사 장경각

경판 한 장의 무게는 3kg정도, 8만장을 모두 합치면 오늘날 2.5톤 트럭 100대 분이다. 몽고군을 피해 강화도에 보관되었던 경판들은 지금까지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는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다. 강화판당에 있던 대장경이 언제 이 곳 해인사로 옮겨지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추적한다.


6. 일본의 관심

일본은 고려 말부터 조선 조까지 끊임없이 대장경을 요구했다. 일본 사신이 대장경판 약탈을 모의하는 서한을 본국에 보내기도 했고, 세종 때에는 일본사신이 대장경을 달라며 단식하는 소동도 빚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 왕은 대장경을 얻지 못하자 조선 사신을 냉대했고 사절단에게 보복을 하려는 왜인도 있었다.

47편: 세종 때 조선에 재팬 타운이 있었다
1. 재팬타운의 모습

제포에는 재덕산을 따라 긴 토성이 왜인촌과 조선인들이 살던 웅천 읍성을 가로지른다. 그 경계 너머에는 일본식 술집과 다다미 가게가 있고, 수많은 일본인이 거리를 활보했다. 이곳은 일본과 조선의 무역품을 사고파는 일종의 무역센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2. 삼포 왜인의 정체

조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대마도는 먹을 것이 부족한 곳이었다. 그래서 대마도사람들의 생계 조달은 자연스레 조선의 침략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의 해결을 위해 조선은 대마도를 정벌하고, 그들에게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한다. 이렇게 상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대마도의 왜구가 바로 삼포왜인이다.


3. 무역항 삼포

무역항 삼포에는 구리, 면포, 관대에 들어갈 수우각(물소뿔)등이 오고 갔다. 삼포는 중국, 일본, 유구를 잇는 핵심적 중개 무역지에 자리잡으면서 그 영향력이 날로 커져 갔다. 심지어 이 곳의 통상수위를 억제하기 위하여 세종은 계해약조를 만들기까지 했다.


4. 조선인과 왜인들의 관계

삼포의 조선인들과 왜인들은 잦은 왕래 속에 친분을 쌓아갔다. 하지만 종종 문화의 이질감으로 인해서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렇듯 서로에 대한 배려와 갈등 속에서 그들만의 삼포 문화를 만들어 갔다. 그것은 조선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5. 조선의 삼포경영

제포는 거제도 조선수군이 진을 치고 있어서 완전한 통제가 가능한 곳이다. 염포는 현재 울산 제 3부두자리로 영청과 수군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부산포는 현 동래구 부근으로 역시 수군진에 의해 통제되었다. 즉 삼포는 내륙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으면서 군사적으로 완전히 통제되는 곳에 세워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조선은 이곳 왜인들에게 무반의 지위를 줌으로써 회유책을 병행하여 삼포를 경영하였다.


6. 삼포왜란 가는 길

이로써 왜구는 사실상 사라지고, 삼포는 백년 간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폐해가 부각되고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삼포 억제책을 사용한다. 이는 결국 1510년 삼포왜란을 유발하게 된다. 항거 왜인들이 대마도와 연결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삼포왜란은 보름 만에 진압되고, 왜인촌은 폐쇄된다. 조선 땅에 세워졌던 최초의 재팬타운은 이렇게 해서 그 짧은 역사를 마감하였다.

100편: 100회 특집 - 천년 전의 벤처, 해상왕 장보고
1. 장보고의 청해진 구상

서남해안에 위치한 청해진은 물길이 복잡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물길을 모르는 사람에겐 항해도 어렵다. 그러나 완도의 물길을 아는 사람에겐 천혜의 요새가 될 수 있다. 더욱이 이곳은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장보고는 여기에 다양하고 편리한 시설에 안전한 보호장치까지 설치해 청해진을 최고의 국제 무역항으로 만든다.


2. 최초의 자유 무역인 장보고

청해진의 시설을 보고 놀란 신라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청해진 대사라는 칭호를 주어 그의 활동을 인정해 주었다. 이때부터 장보고의 본격적 무역활동이 진행되었다. 그는 당나라의 물건을 일본에 파는 중계무역을 벌인다. 또한 일본과의 국교가 단절된 9세기에는 장보고만이 일본과 교역을 계속 하였다. 9세기는 바야흐로 동서양 교역의 시기 실크로드를 따라온 이슬람,페르시아 물건들은 장보고를 거쳐 신라와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3. 중계무역에서 가공무역으로

장보고는 국가조직과 별도로 움직이던 독립 무역선단이었다. 그는 동아시아 무역질서에 신용거래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아가 장보고는 유통무역의 한계를 벗어나기에 이른다. 신라와 일본, 이슬람까지 탐내던 당나라의 독점 수출품목 월주요. 이 자기의 수요가 늘자 장보고는 직접 만들면 수지타산이 맞겠다는 판단을 하여 제작에 들어간 것이다. 월주요는 동아시아 삼국의 무역현장에서 모두 발굴된다.


4. 장보고 선단의 무역활동이 가능했던 이유

이미 9세기에 현대와도 같은 빠른 정보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던 장보고 무역선단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장보고는 물산이 운송되는 물류창고이자 정보의 집결지인 운하를 최대한 활용해 정보기지를 구축하였다. 극도로 조직화된 장보고 선단은 정보, 금융을 아우르는 종합상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5. 국제 무역을 가능케 한 힘, 재당 신라인

8세기말부터 많은 신라인들이 가난, 골품제도를 피해 당나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자치 조직인 신라방을 거점으로 결집하기 시작하여 특산물 생산과 운하변을 장악하고 9세기에는 당나라 물류를 석권한다. 장보고는 당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던 재당 신라인을 하나로 통합해낸다. 그것이 장보고의 국제무역을 가능케 했다.


6. 미천한 섬사람 장보고

미천한 섬사람, 삼국사기는 장보고를 ‘미천한 섬사람’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장보고는 서남해안 섬에서 태어나 가난과 신분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당나라로 건너갔을 것이다. 당나라는 뛰어난 무예를 갖춘 장보고를 군 관리로 임명했다. 후에 그는 신라인들의 실질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는 법화원을 세운다. 그때부터 소규모로 이루어지던 당과 신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이 장보고를 우두머리로 보다 강화되고 대규모화된다. 장보고는 시대를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실현시킬 추진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21편: 완도 바다 속 3만 청자의 비밀
1. 잠들어 있던 수 만점의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다

전라남도 완도의 어두지. 조개 잡이를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네 점의 청자가 걸려 올라왔다. 감정결과 청자는 고려시대 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갔고, 바다 밑에서 영원히 잠들 뻔했던 고려의 유물 수만 점이 수면 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2.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고려의 배

완도 해저유물선 발굴작업은 3만여 점의 유물을 인양한 것으로 마무리 되는 듯 했다. 그런데 뜻밖에 제법 완전한 형태의 나무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배의 발견은 사학계를 흥분 시킨 사건이었다. 고려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실제 배는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침몰선은 전형적인 우리의 한선이다

12세기의 고려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록 배 바닥과 옆면만이 남아있었지만, 배에는 배의 원형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숨어있었다. 완도 해저 유물선은 그 동안 토기와 문헌으로만 볼 수 있었던 우리 배의 형태나 제작기법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4. 청자로 만든 장고

배 안에 실린 유물들 중에는 그릇, 대접, 항아리 등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유물들 중에서 위와 아래가 트여있어서 병이나 항아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독특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이화여대박물관에도 이와 같은 모양의 청자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청자로 된 장고이다. 그렇다면 청자장고는 어떠한 소리를 낼까. 그 소리는 악기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소리일까.


5. 완도 앞 바다에서 발견된 청자의 실체

우리는 청자라고 하면 특유의 푸른빛 비색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완도 앞 바다의 청자는 비색보다는 녹갈색에 가까운 빛을 띠고 있다. 12세기 고려청자의 절정기에 왜 녹갈색에 가까운 청자가 생산된 것일까? 완도바다 속의 녹갈색 청자의 실체가 밝혀진다.


6. 침몰된 배는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완도해저유물선 안에서 발견된 삼만 여 점의 녹청자는 어디서 어디로 옮겨가고 있다가 침몰되었을까? 3만점에 달하는 녹청자의 행선지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녹청자의 생산지를 찾아보아야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완도 앞 바다에서 녹청자가 인양되기 불과 두 달 전에 해남에서 대규모 녹청자 가마터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7. 30,000여 점의 녹청자는 어디로 실려가고 있었나

3만여 점의 녹청자를 실은 배의 구조를 살펴보면, 유물선은 연안을 따라 운항하던 연안 운반선일 가능성이 높다. 녹청자를 가득 실은 배는 연안을 따라 운항하며 무엇을 하려했던 것일까?

68편: 원효는 왜 파계승이 되었나?
1. 일본에서의 원효

일본의 유서 깊은 화엄사찰 고산사. 이곳이 바로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화엄연기>가 있던 절이다. 누가 무슨 이유로 화엄연기를 만들었을까.
중세 일본의 대표적인 고승이었던 이 절의 중건자, 묘에는 원효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이러한 원효의 영향은 일본 화엄종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는데...


2. 출가하기 전 원효

경산에서 태어난 6두품 출신의 청년, 원효. 삼국유사에 보면 원효의 속성은 설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순창 설씨의 족보에는 원효의 이름이 나타난다. 기록에 의하면 원효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사리사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제석사는 조선 인조 때 당시 인근에서 유일한 절터였던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이곳에 이전부터 유명한 사찰 사리사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3. 원효의 깨달음

원효가 당나라 유학을 가려던 길에 무덤 속에서 해골물을 달게 마시고 그 다음날 깨달음을 얻어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기록으로는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 정말로 원효는 해골물을 마신 뒤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4. 깨달음 이후의 원효의 삶

깨달음을 얻은 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에 머문다. 깨달음에 도달한 그가 써낸 책들은 쉽고 명료했다. 이러한 원효의 책들은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이 당시 중국불교는 치열한 사상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원효는 서로 다른 종파간의 대립과 갈등도 부처의 가르침인 한마음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융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화쟁사상을 주장한다.


5. 귀족출신 승려가 민중 속으로 뛰어든 이유

한창 명성을 얻고 있던 원효는 어느 날 갑자기 붓을 던진다. 그리고 민중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불법을 전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결국 원효는 승복까지 벗고 환속한 거사로서 아무런 계율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그 안엔 원효의 민중에 대한 깊은 사랑과 그의 높은 인격이 담겨 있다.


6. 원효에 대한 평가와 인식

원효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전환의 계기는 일본에 의해서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원효가 주를 단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원효의 손자인 설중업을 극진히 모셨다. 이 사건을 통해 신라에서도 원효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그를 기리는 서당화상비를 세운다. 원효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고려시대에 더욱 높아졌다. 여전히 남아있는 원효의 관련 설화들은 그가 민중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5편: 신라 최후의 미스터리, 마의태자
1. 인제에는 신라최후의 비밀이 남아있다

강원도 인제에 전해 내려오는 마의태자의 전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르다. 마의태자는 산 속에서 풀을 뜯어 먹으며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신라부흥운동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인제군 여기저기에는 마의태자에 대한 구체적인 유적과 생생한 전설들이 널려 있었다.


2. 경순왕이 인제에 왔었나?

인제 지역 전설의 주인공이 처음부터 마의태자였던 것은 아니다. 인제에 김부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김부리’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전설의 주인공이 경순왕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믿어 왔었다. 하지만 김부리의 대왕각신위를 보면 전설의 주인공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이다. 그렇지만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은 경순왕일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경순왕의 행적을 추적해본다.


3. 경순왕 김부(金富)와 마의태자 김일(金鎰)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 과연 김부(金富)는 누구인 것일까? 위치와 이름으로 봤을 때 김부대왕동은 마의태자와 분명히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 김부와 김일, 마의태자는 이 이름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인제 갑둔리에서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었다.


4. 개골산루트의 미스터리

마의태자에 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에서는 그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인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마의태자의 유적이 있는 인제는 금강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경주와 금강산, 인제. 이 세 지역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마의태자가 경주에서 금강산까지 가기 위해 선택했던 길을 살펴봐야 한다. 신라시대 때 흔히 경주에서 금강산까지 가기 위해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은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었다. 그런데도 마의태자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5. 왜 인제인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로 하자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뜻에 강력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그런 마의태자가 아무런 저항 없이 금강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지는 않았을 듯 하다. 더욱이 신라에는 경순왕의 항복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리고 고려에 항복한지 200년이 흐른 뒤에도 각지에서는 신라부흥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려에 항복한 후 마의태자가 택한 곳은 강원도 인제였다.


6. 신라부흥의 꿈은 금나라로 이어진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에는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인? 신라인들의 부흥의지는 만주대륙으로 이어져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51편: 300년 전 '여성군자'가 쓴 요리백과 - 음식디미방
1. 음식디미방-요리백과사전

안동에 살던 정부인(貞夫人) 장씨에 의해 쓰여진 음식디미방. 한글로 씌어진 이 책의 내용을 보면 다양한 음식의 조리법이 종류별로 나뉘어 체계적으로 적혀있다. 국수, 만두를 비롯한 면병류, 어육류, 소과류, 주류까지 종류가 모두 146가지다. 조리법 뿐 아니라 그 발상이 비닐하우스와 비슷한 보관법에까지 정통한 이 책의 저자는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정부인 장씨의 학문적 소양

장씨는 숙종때 이조판서까지 지냈던 갈암 이현일의 어머니다. 그녀는 1598년 안동장씨 장흥효 가문에서 태어났다. 대학자였던 부친을 둔 덕으로 그 시대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자연스레 학문을 접할 수 있었던 그녀는 시경,서경까지 터득하였고, 글씨, 그림실력도 뛰어났다.


3. 실증적 요리서 중 최초!

음식디미방 이전에도 요리책은 있었지만, 한문으로 쓰여져 있고 간단한 소개정도에 그쳐 실용성과 편리함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 책은 내용이 한글로 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46가지 음식에 대한 장씨만의 비법과 조리기구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지금도 이 책을 따라서 그대로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다.


4. 양반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 음식디미방

당시 양반집에서는 다양한 술을 빚었다. 탁주는 주로 종들이 마시게 했고 손님접대에는 청주를 사용했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손님접대문화가 다양한 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음식디미방은 조선시대 문화를 읽게 해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음식디미방은 단순한 요리서가 아니라 조선중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역사서이다.


5.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던 정부인 장씨

최근 정부인 장씨의 가정에 대한 충실을 예찬한 이문열의 소설에 대해 여성계에서는 현대여성이 추구하는 삶에 역행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하지만, 이런 분분한 논쟁은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정부인 장씨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녀의 시대적인 배경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7세기 임란,호란으로 무너진 질서가 재 복구되던 시기,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6. 맛질방문이란?

음식디미방에 적힌 음식 중 16가지 음식 밑에는 맛질방문이라는 말이 쓰여있다. 이 말의 뜻을 놓고 갖가지 해석이 대립하던 중 실제 뜻은 참으로 소박한 곳에서 드러났다. 정부인 장씨의 외갓집이 있던 곳이 경북 예천에는 맛질마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에게 듣고 배웠던 요리까지 음식디미방에 적으면서 ‘맛질방문’이라 쓴 것이다.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해지길 바라는 그녀의 마음은 맛질방문을 통해 얻어진 최고의 요리책, 음식디미방 곳곳에 스며있다.

75편: 조선시대 대학에도 학생회가 있었다
1. 원점제도

성균관에는 요즘 대학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제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 출석체크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식당에서 이뤄졌는데 출석일수를 점수화 시키는 것으로 원점제도라 한다. 원점제도는 근면함을 측정하는 것으로 과거의 당락을 결정짓기도 하였다. 당연히 부정한 방법으로 출석점수를 고치는 편법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기도 했다.


2. 성균관 기숙사

조선시대 대학생들은 전원이 의무적으로 기숙사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곳은 동재와 서재로 구분되는데 지금도 붓과 벼루 대신 컴퓨터가 들어왔을 뿐 방안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채 성균관 대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유생들의 학구열은 대단하여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관내 약방이 생겨났고 혜민서에서는 의원이 파견 나와 학생들을 돌보기도 했다.


3. 흥미로운 과거 시험장 풍경

유생들 사이에서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각종 부정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그 모습들이 현재와 너무도 흡사하여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붓두껑에 컨닝 페이퍼 숨기기, 콧구멍에 숨기기, 답안지에 이름을 바꿔 붙이는 절과 등, 이에 맞서 시험관의 적발방법도 덩달아 개발되어 재미있는 시험장 문화를 낳기도 했다.


4. 국가의 관심과 지원

성균관에서 길러진 인재들은 과거를 통해 국가관리로 임용되는 만큼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은 대단했다. 그 규모만 해도 궁궐 다음이었고 문헌을 보면 국가예산의 절반이 성균관에 투입됐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다.


5. 조선시대 대학가

왕세자까지 공부했던 성균관에서는 학령이 엄격했기 때문에 바둑이나 장기 등의 놀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그 당시 대학가였던 반촌이라는 곳에 나와 향수를 달래고 스트레스를 풀었다. 당시 성균관 앞에는 반수라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건너편 마을을 반촌이라 하였다. 이곳은 음료수를 팔기도 하고 하숙집도 많아 유생들의 해방구와 같았을 것이다.


6. 조선시대 학생회의 역할

조선시대 총학생회인 재회는 신입생 환영회, 자체 징계 등 관내 자율운영을 담당했지만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의 대자보와 같은 벽서를 성균관 곳곳에 붙여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도 했고 국가나 사회에 부당한 일이 있을 때는 수업거부나 동맹휴학을 통해 그들의 뜻을 펼치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은 대부분 젊은 기개와 정의감에 바탕하고 있어서 조정에서도 많은 부분을 정책에 반영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8편: 66세 신랑, 15세 신부 - 영조의 결혼
1. 왕과 왕비의 의장행렬

‘반차도’에 의하면 결혼식은 참가인원 1188명에 말이 391마리나 된 국가적 축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퍼레이드는 창경궁, 홍화문, 돈화문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시행되었다. 66세나 되는 영조는 웃어른이 없어 스스로 결혼식을 처리하는 가운데 15세 소녀를 왕비로 맞았다.


2. 새 왕비를 맞이한 영조

왕이 왕비를 맞이하는 이유는 ‘교명문’에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첫 왕비가 승하했고 영조 나이 66세에 계비를 맞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영조가 남아있던 후궁 중에서 왕비를 뽑지않은 이유는 숙종때 후궁인 장희빈이 왕비를 모함해 왕비자리에 오른 폐해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3. 왕비의 자격요건

우선 새 왕비를 뽑기 위해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진다. 이후 후보자들은 왕실에 참가신청서를 내는데 그것을 단자라 하였다. 단자에는 규수의 제반 사항이 자세히 적혀있다. 왕비 후보자는 그 중에서도 특히 가문이 중요한 요건이었다.


4. 간택의 기준

왕실의 웃어른에 의해 이루어지는 간택의 경우 삼간택이 필수였다. 모두 가문이 명문인 바에야 간택의 결정적인 요소는 아름다움, 자태, 언행, 교양 이었다. 당시에도 아름다움은 필수적이어서 인상이 견실하고 건강해 보이는 미인이 선호되었다. 통상적으로 조선시대 미인으로 알고있는 풍속화의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얼굴의 미인은 서민형이다. 권력층에서는 이를 천한 얼굴로 여겼다.


5. 영조가 간택을 한 이유

최후로 올라간 후보 3인은 가문이 명문이지만 부모의 지위가 높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영조가 삼간택을 거치면서 정순왕후를 직접 고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선택에는 신분 콤플렉스와 당파싸움의 폐해를 뼈저리게 경험한 배경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영조는 충청도 지역의 학통을 잇는 집안의 정순왕후를 선택했다.


6. 정순왕후는 어떻게 살았나


영조의 치밀한 정치적인 계산 속에서 왕비로 선택된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그녀는 간택 되자마자 원삼에 족두리 차림으로 별궁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 그녀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져 왕비로서의 생을 살게된다. 하지만 그 삶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들인 사도세자나 며느리 혜경궁 홍씨도 그녀보다 10살이나 많았고, 사이 또한 좋지 않았다. 영조는 결혼 16년만에 승하했고 홀로 남은 정순왕후는 권력에 집착했다. 나이 어린 순조 대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는 이후 죽을 때까지 고집스러운 섭정을 계속했다.


7. 영조의 결혼 비용

\'가례도감의궤\'에는 결혼식에 사용된 소품목록도 상세하게 적혀있다. 영조는 국가 재정에 매우 밝아 국혼정례를 만들어 혼례 비용을 줄이도록 한 임금이었다. 그런 까닭에 영조의 결혼에는 다른 임금들의 결혼과는 다른 특징이 있었다. 수리소가 그것이다. 이전의 왕들이 물품을 새로 만들어 사용했다면 영조는 옛 것을 고쳐서 사용한 것이다. 외화가 부족했던 당시 영조는 스스로 검약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신의 통치철학을 실천했던 것이다.

58편: 온천궁궐, 온양행궁의 비밀
1. 온양행궁의 흔적

영괴대라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와, 신정이라는 온천수가 온양행궁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지만 행궁은 그저 흔적만 존재할 뿐 이미 역사에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온양행궁은 왕의 휴식처가 아닌 온천숙박업소로 전락한 것이다.


2. 사라진 궁궐의 모습

보통 행궁이 왕이 머물다가는 곳이라 행궁과 왕이 머무는 건물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온양행궁에는 온천을 할 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 있었다. 이 건물은 장기간 머물게 될 왕을 위해 언제든 국정을 볼 수 있게 궁궐의 특징을 그대로 옮겨온 궁궐의 축소된 형태였다. 그 상세한 언급은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기까지 기록을 담은 ‘온궁사실’에 자세히 전한다.


3. 왕이 온양행궁에 머문 이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5명의 임금과 사도세자가 온양행궁을 다녀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곳에 오게 되면 보통 한 달이 넘는 장기간의 긴 일정으로 머물렀다고 한다. 역사서를 보면 당시 피부질환은 쉽게 치료되지 않았는데 어의들은 온천이 효과가 있다고 처방하였다.


4. 왕의 목욕

왕은 어떻게 목욕을 했을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목욕과 관련한 기록을 극히 제한하고 있지만 연산군 일기에서 그들의 생활을 유추할 수 있었다. 거대한 탕실과 화려한 목욕용품, 왕의 목욕을 거드는 사람들...


5. 온양행궁의 효과

온양온천의 발견은 백제 때까지 올라간다. 다리를 다친 학이 온천에 발을 담그고 다리가 나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조선의 왕들이 온천을 찾은 것은 온양행궁의 의술적인 치료효과 때문이었다. 세종은 병에 차도가 있어 마지막으로 온양에 다녀온 이듬해, 훈민정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6. 온양행궁 - 또 하나의 궁궐

왕들은 휴식과 질병치료를 위해서만 이곳에 머물렀던 것일까?
대개 온양행궁에 행차한 왕은 짧게 1주일에서 길게는 두 달 이상 머무르게 된다. 왕들은 단지 온천욕으로 질병치료에만 전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곳에 머물면서, 지역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고, 또 다른 국정을 보았던 것이다.
14편: 신라산 양탄자는 일본최고의 인기상품이었다
1. 양탄자의 꼬리표

현재 정창원에는 꼬리표가 붙은 양탄자 두 장이 있다. 이 꼬리표는 처음부터 붙어있던 것으로 구입 후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왜 이 같은 꼬리표를 붙였던 것일까. 꼬리표를 붙인 양탄자들은 신라에서 만든 것임을 표시한 일종의 수출 상품이었다.


2. 신라의 수출상품

정창원의 양탄자들은 신라 진골 귀족가문의 공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는 페르시아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켜 독자적인 양탄자를 생산해 냈다. 신라의 모직물 제작기술에 대해서 중국 <두양잡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교묘하고 아름답기가 일세의 최고였다. 춤추고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벌과 나비가 춤추는 모습이 마치 실제와 흡사하여 진위를 구별할 수가 없다’


3. 신라 사절단의 행적

신라 사절단이 일본에 온 이유는 동대사의 대불 개안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일본 황실은 3년 여에 걸친 노력 끝에 노사나대불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를 자랑하기 위해 일본내의 귀족들은 물론 각국의 사절단을 개안식에 초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나라에 도착한 신라사절단은 370명 뿐으로 일본에 온 총 700명의 인원 중 330명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들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했던 것일까.


4. 신라물건은 신분과시용?

정창원에 보관된 유기제품 중에는 신라에서 수출 될 당시의 포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것도 있었다. 당시 일본 귀족들은 신라유기를 사용해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조개껍데기에 나무를 엮어 숟가락 대신 사용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 신라의 유기로 만든 숟가락세트는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이처럼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물건들은 단순한 수입품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일본귀족 문화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상층 귀족문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5. 천평문화의 기반이 된 신라

화려하고 귀족적인 색채가 돋보이는 정창원의 보물들은 8세기 전후 세계각지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정창원의 보물로 상징되는 8세기 일본문화를 천평문화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천평문화를 당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이룬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7,8세기 당과 일본 사이의 교류 현황을 살펴보면 단지 네 차례에 불과하다. 반면 같은 기간동안 일본에서 신라로 24번. 그리고 신라에서 일본으로 총 39번의 사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63편: 역사추적, 심청의 바닷길
1. 심청이의 마을

섬진강이 흐르는 강변에 자리잡은 전라남도 곡성의 작은 마을, 송정리. 마을 사람들
은 심청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다. 이 동네 한가운데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심청이가 마을 아낙네들에게 젖을 얻어 먹던 곳이라고 한다. 이 우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데, 마을 사람들은 심청의 효심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송정리 사람들은 심청이가 왜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을까.


2. 관음사 사적기

곡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송광사에 송정리 사람들이 심청이 실존 인물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처음으로 공개한다면서 조심스럽게 내보이는 관음사 사적기였다. 관음사 사적기는 심청과 같은 한 효심 깊은 처녀와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내용은 심청전과 거의 같았는데, 다만 주인공이 심청이 아닌 원홍장이라는 처녀였다.


3. 관음사의 홍장보살상

관음사는 원홍장이 보내온 불상을 모셔서 창건한 절이다. 중국으로 건너간 원홍장이 불상을 만들어서 고향으로 보낸 시기를 나타내는 기록을 보면, 서기 300년. 그러니까 원홍장은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의 인물이다.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의 한적한 산자락에 위치한 관음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고 평범한 절이었다. 하지만 관음사는 17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4. 중국과 곡성을 잇는 뱃길

인당수에 빠지는 소설 속의 심청의 운명과는 달리 실존 인물 원홍장은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갔다. 그리고 고향으로 불상을 보냈는데, 원홍장 처녀가 불상을 보낸 중국 절강성과 한반도 곡성은 엄청난 거리이다. 절강성 근해의 보타도 앞바다에는 신라초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신라 상인들이 관음상을 싣고 가려다가 이 바위에 부딪혀 좌초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을 1700년 전에, 불상을 실은 배가 대양을 건너 곡성까지 올 수 있었을까.


5. 중국 상인들이 곡성에 들어온 이유

원홍장이 살았던 서기 300년경에는 중국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던 시기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중국 상인들은 그 많은 지역 중에 왜 하필이면 내륙 깊숙한 곡성까지 들어와서 처녀를 데려갔을까. 원홍장의 빼어난 미모 때문이었을까. 심청마을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검붉은 담벼락이다. 비만 오면 녹물이 흘러내린다는 돌담, 돌담을 쌓은 돌들이 철 성분을 다량으로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상인들이 내륙 깊숙한 곡성까지 온 이유도 이 철 때문이었다.


6. 인당수와 용궁

인당수는 과거 바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최대의 표현은 인신공희. 사람을 제물로 삼았던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중국으로 가는 길목인 위도와 죽망동 일대에서 인신공희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7. 심청전의 다양한 공간 배경

백령도와 부안 외에도 심청이와 관련된 설화나 지명이 전해지는 곳은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 지역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다와 통하는 곳에 오래된 마을과 절이 있고, 해상 교통이 가능했던 지역이라는 것이다. 내륙 역시 과거에 바다였거나 강을 통해 바다와 교통이 이어지는 곳이다. 심청전은 뱃길로 이어진 한국과 중국 간 교류의 역사를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30편: 가야인은 성형수술을 했다
1. 수수께끼의 인골

김해시에 위치한 작은 마을 예안리. 그저 평범한 농촌의 한 귀퉁이 논에서 1600년 전의 역사가 깨어난 것은 우연에 의해서 였다. 당시 땅주인이 논을 개간하려고 흙을 파내자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 나왔던 것이다. 땅속에서는 오래된 무덤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고고학자들은 이 놀라운 발견에 주목했다. 그곳은 가야인들의 집단 무덤터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발견은 가야인의 인골이었다.


2. 편두를 한 가야인

중국의 역사서에는 가야인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했다. 지금도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납작하다’ 기록 속의 진한에는 김해지역의 가야인도 포함된다. 머리를 납작하게 한다고 해서 그 당시에는 이를 편두라고 했다. 역사 속에서만 존재했던 편두의 실체를 예안리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인들은 어떻게 편두를 만들었을까.


3. 예안리 무덤터

가야인들이 조성한 예안리의 무덤은 밀집된 이중구조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인골만 해도 190여 체.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을 모두 합해도 예안리 인골의 숫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왜 예안리 땅에서만 이렇게 많은 인골이 나왔을까. 겉으로 보기에 무덤터는 그저 평범한 땅이였지만 그곳에 뜻밖의 실마리가 있었다.


4. 인골에 담긴 가야인의 삶

1600년 전 가야인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질병을 앓았으며, 또 무엇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을까? 인골에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다. 특히 인골 중에서도 치아는 가장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있다. 예안리 가야인의 인골들은 기나긴 세월의 침묵을 깨고 자신들의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5. 가야와 늑도 그리고 일본

경남 사천시 앞 바다에 위치한 늑도는 100여 가구가 살고있는 작은 섬이다. 섬전체가 유적지라고 할 정도로 늑도에서는 지금도 기원 전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런데 늑도에서 출토된 인골이 예안리의 인골과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안리 가야인들과 같은 계통이었던 것이다. 늑도에서 발굴된 한 인골은 송곳니를 뺀 것으로 보이는 발치의 흔적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큐슈 지방에서도 발치를 한 인골이 출토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렇게 똑 같은 풍습이 나타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실마리를 찾은 것은 늑도에서 출토된 유물에서였다.


6. 가야 사회의 변화

4세기 이후 가야인골에서 편두의 풍습은 사라진다. 그리고 무덤의 양식도 변했다. 그리고 느닷없이 이전에는 없었던 매장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바로 순장이다. 이것은 가야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문화가 사라지고 새로운 문화가 등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16편: 가야 흥망의 블랙박스, 철갑옷
1. 세련된 철갑옷의 나라, 가야

가야 최고의 생산품이자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는 제품인 철갑옷. 철갑옷이 본격적으로 출토된 것은 지난 1980년, 가야고분이 열리면서부터 였다. 육중한 돌문이 들리면서 가야의 유물들이 1600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그것은 가야의 역사가 빛을 보는 순간이기도 했다. 가야 무덤에는 갑옷 한 벌이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그 뒤에도 철갑옷들이 연이어 출토되었다. 또한 갑옷과 함께 철 투구가 출토되기도 했다.


2. 철갑옷 제작방법

가야인들은 철갑옷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모든 갑옷들은 불에 달군 쇠덩이를 반복적으로 두드려 만든 단조품이다. 전문가들과 함께 갑옷을 제작해 보기로 했다. 입체디자인과 정결, 그리고 단조는 철갑옷으로 확인한 가야 철 기술의 핵심이었다.


3. 철의 왕국 가야

다른 지역에서는 가죽갑옷이 대부분이던 시기에, 가야는 이미 철갑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죽 대신 철로 갑옷을 만든 가야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 기록에 따르면 가야는 철 생산국과 수출국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철을 화폐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철 교역으로 동아시아를 제패한 나라 가야는 철 생산력뿐만 아니라 그 분배권까지 장악했던 철의 왕국이었다.


4. 신라를 물리친 가야

철창, 군사용 도끼, 쇠칼. 이런 많은 무기류들은 모두 가야 고분에서 나온 군사용 철제 무기이다. 이것은 가야가 강성한 고대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출토 유물을 볼 때 금관가야의 병력은 서기 4세기 대까지 신라보다 우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철제 갑주 때문이었다. 철갑으로 완전 무장했던 강력한 기마전단을 보유한 금관가야는 신라와 충돌을 일으키며 한반도 남부의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5. 금관가야의 멸망

서기 400년. 한반도 남부에 일순 돌풍이 인다. 당시 동북아 최강 부대였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5만 대군이 한반도 남부로 돌진해 온 것이다. 그리고 금관가야는 고구려 군에 대항하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이로써 한반도 사상 초유의 대전은 금관가야의 참패로 종결된다.


6. 멸망이후의 금관가야

패전한 가야는 어떻게 되었을까. 서기 400년 무렵 일본열도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다. 새로운 형태의 철갑옷이 급작스럽게 출현한 것이다. 획기적인 변화는 출토량에서도 나타난다. 400년을 경계로 일본 철갑옷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금관가야는 패망했지만 철갑옷이 상징하는 그들의 철 문화는 그 후에도 꺼지지 않고 계속 피어났던 것이다.
39편: 삼별초,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1. 삼별초의 봉기

삼별초는 고려가 몽고와 싸울 때, 선두에 섰던 가장 핵심적인 반몽집단이다.
‘몽고병이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정으로 모여라!’삼별초는 고려왕조가 몽고에 굴복하자 반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내는 것은 한 나라의 정부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삼별초는 나라를 세우고 정부를 구성했던 것일까. 삼별초가 난을 일으켰던 강화로 간다.


2. 진도를 택한 이유

삼별초는 개경 정부의 공격을 피하고 새로운 거점을 물색하기 위해 서둘러 강화를 떠난다. 당시 삼별초가 이끌었던 배는 무려 천 여 척. 거기에는 결연한 항몽의지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포 앞바다의 진도에 닻을 내리게 된다. 삼별초가 진도를 선택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3. 삼별초의 정통성

삼별초는 진도에 새로운 도성을 마련하고 궁궐 용장성을 구축했다. 용장성은 웅장했고 한 나라의 성으로서 손색이 없는 면모를 갖췄다. 삼별초는 진도를 장기적으로 경영 하려했고, 몽고와 끝까지 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라는 국호로 일본에 외교문서를 보낸다. 그렇다면 삼별초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지 않고 굳이 고려의 정부를 내세웠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4. 삼별초의 세력권

삼별초는 내륙으로의 세력확장을 끊임없이 시도했고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삼별초는 워낙 정예 군대였고, 오랫동안 몽고와 전쟁을 치르면서 전투경험도 풍부해진 군대였다. 삼별초의 해상 능력은 막강했는데, 징과 북을 동원하고 함선에 괴상한 동물을 그려 바다에 비추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적을 먼저 심리적으로 제압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도를 거점으로 해상왕국을 구가했다.


5. 민중정부 삼별초

삼별초에 대한 민심은 각별했다. 특히 삼별초가 봉기 직후에 도적을 불태우면서 민심을 끌어당기게 된다. 도적이란 정부 문서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노비 문서도 포함된다. 노비문서를 불태우면서 삼별초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 그리고 민중의 정부를 지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신분제도가 엄격한 사회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의식이 가능했던 것은 삼별초 지휘관들의 출신배경 때문이었다.


6. 진도에서의 최후

1271년 5월15일. 진도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했다. 여몽 연합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것이다. 병선 4백 여 척에 군사는 만 명이 넘는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한달 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감행한 총공격으로 삼별초는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다. 그리고 용장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지금도 진도에는 당시의 상황을 대변하는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있다.


7. 삼별초의 제주항쟁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오자마자 우선 방비를 튼튼히 했다. 그리고 겹겹의 저지선을 마련하고 다시 해상활동을 전개, 본토의 연안 지역을 공략해 나갔다. 그러자 개경 정부와 몽고는 마침내 제주를 공격한다.

64편: 조선시대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1. 비차를 만든 사람

비차를 만든 사람은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했던 정평구란 인물과 윤달구란 인물이었다. 그러나 비차 발명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가문 족보에 조차 남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기구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헛소문으로 취급한 것이다. 하지만 비차는 막연한 상상이 아닌 구체적인 사실이었다.


2. 비차의 형태

조선의 비행기, 비차는 어떤 형태였을까. 이제껏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비차 복원을 위해 건국대 기계항공학부 교수들로 복원팀이 구성되었다. 설계와 기술적인 자문은 우리나라 항공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전 초경량 항공기 협회장 이원복 교수가 맡았다. 복원팀을 이끌고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할 팀장은 윤광준 교수. 그리고 설계부문에 박훈철 교수가 합류했다. 비차 복원팀은 이규경의 기록을 토대로 기본설계 작업에 착수했다.


3. 비차의 원리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하늘을 나는 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지구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중력이다. 이 중력을 누르고 하늘로 올라가려는 힘을 보통 양력이라고 하는데, 양력이 중력보다 세면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비차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이 원리를 알고 있었을까. 비차는 어떤 원리로 하늘을 날았을까.


4. 비차의 추진장치

기록을 보면, 비차에 풀무 같은 장치가 있는데, 이것이 공기를 일으켜 날게 했다고 한다. 이 풀무가 곧 비행기를 날게 하는 추진장치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비차 복원팀은 이 대목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풀무의 원리를 이용해 비차를 날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추진력을 내는 추진장치는 어떤 형태였으며, 어떤 원리로 비차에 장착되었던 것일까. 더욱이 이규경이 종합한 기록 속에는 비차는 풀무장치뿐만 아니라 양 날개를 움직여 얻어지는 풍력에다, 자연 바람을 이용하는 방법까지 모두 동원했다고 적혀있다. 복원팀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이 과제를 풀어보기로 했다.


5. 비차의 비행

비차 복원팀은 3개월 간에 걸쳐 비차 복원 작업을 완성했다. 이 비차는 과연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비행실험에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복원팀은 정평구가 진주성에서 비차를 날려 30리나 날았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그리고 비차 복원팀은 서울시내에서 진수성과 가장 비슷한 조건을 가진 몽촌토성을 비행실험 장소로 선택했다. 비행기의 실험비행에는 늘상 위험이 뒤따른다. 이에 대비해 이번 비행은 20년의 전문 스턴트맨이 맡았다. 드디어 모든 비행준비가 끝났다. 조선시대 비차, 과연 비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6. 비차가 사라진 이유

비차는 존재했으며, 하늘을 날았다. 그런데 그런 사실들을 왜 많은 사람들은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것일까. 또한 비차를 계속 발전시키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18세기 조선은 이전과 분명 다른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비차가 영원히 전설 속에 묻히지 않고, 기록으로 되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18세기 조선의 사회 흐름 때문이었다.
34편: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나
1. 분황사의 금바늘과 은바늘

이땅 최초의 여왕은 선덕여왕이다. 경주에 있는 분황사에는 선덕여왕 때 세워진 탑이 하나 있다. 분황사 석탑, 향기로울 분(芬), 황제 황(皇)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이라는 이름을 가진 절의 이 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올렸는데, 참 아름다운 탑이다. 그런데 이 분황사 석탑에서 선덕여왕과 관계가 깊은 아주 독특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금바늘과 은바늘이다.


2. 선덕여왕의 가문

선덕여왕의 집안을 살펴보면 아버지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대신 진평왕에게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맏딸 덕만공주가 훗날 왕위를 잇게 된 선덕여왕이었다. 둘째딸은 김춘추의 어머니이고, 막내딸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과 결혼한 인물이다.


3. 선덕여왕의 즉위

'신성한 황제의 혈통을 이은 여인'이라는 뜻의 '성조황고'라는 존호가 붙여진 선덕여
왕. 그러나 선덕여왕 이전의 왕들에게는 따로 존호를 붙인 기록이 없다. 왜 선덕여왕만 유독 성스러운 혈통을 강조했던 것일까? 당시 여왕을 옹립했던 대표적인 세력은 김춘추와 김유신이었다.


4. 여왕의 탄생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딸이 왕위를 잇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사위나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한 일도 없었다. 여성의 가계에서 왕이 나타나고, 여왕까지 탄생한 일은 유독 신라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경주에 있는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인 황남대총에 신라에서만 여왕이 나타날 수 있었던 단서가 숨어있다.


5. 신라 여성의 지위

경상남도 울산군에 있는 한 바위에는 신라 여성의 지위를 알려주는 흔적이 남아있다. 남녀의 이름이 실명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나란히 새겨져 있는 바위. 이 바위는 신라여성의 지위를 가늠하게 하는 열쇠이다. 실제로 신라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떠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지위를 나타내는 척도는 경제력이다.


6. 비담의 난 - 진덕여왕의 즉위

여성이 아무리 지위가 높았다고 해도 왕까지 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여왕이 통치하게 되면서 여왕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은 없었을까. ‘한 밤 중에 반월성에 큰 별이 떨어졌다’647년 비담의 난 때 있었던 일이다. 반란군은 반월성에 떨어진 별을 보고 승리를 장담했다고 한다. 수많은 귀족들이 가담했던 이 반란의 명분은 여왕의 통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76편: 조선시대 역관은 갑부였다
1. 변승업은 조선시대 최고의 갑부

허생전 변부자의 실제모델로 알려진 숙종 시대 역관 변승업은 지금으로 말하면 천억 이상의 돈을 가진 부자였다. 그리고 부인이 죽었을 때 감히 왕가의 상제를 행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던 인물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중인이 양반처럼 선산을 구축한 것은 당시 변승업 집안의 위세를 짐작케 한다.


2. 역관의 부 축적 근원은 청일간의 중개무역

당시 사대부들은 외국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역관은 외교상 이루어지는 모든 부문에 간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구입한 물품들을 청과 무역을 할 수 없었던 일본에 두 세배의 차익을 남기고 팔았다. 17세기 후반, 청과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왜관을 통해 중계 무역이 이루어지자 역관은 더욱더 많은 부를 축적 할 수 있었다.


3. 부와 명예, 역관들은 세습을 원했다

변승업의 경우 형제 9남 1녀 중 6명이 역관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손까지 계속되어 280년간 106명의 역관을 배출했다. 역관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은 사역원이었는데 이 곳은 역관의 추천을 받아 심사를 통과한 사람들만이 입학할 수 있다. 그리고 전, 현직 역관들이 직접 이들을 심사했다. 천거 받기도 어렵고 천거 됐다 하더라도 누가 추천을 했느냐에 따라 합격에 상당한 영향이 있었으니 당연히 세습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사역원의 교재

사역원에는 우어청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조선말은 쓰지 못하고 외국어만 사용하게 한 순수한 회화 교실이었다. 교재로는 중국어에 <노걸대>, 일본어는 <첩해신어>가 사용되었고 이 책은 완전한 구어체로 만들어져 있다. 교역에 관련된 실용 대화들이 많고 문장의 구성도 상당히 체계적이다.


5. 외교에서의 활약

사역원의 우수한 인력은 무역뿐 아니라 외교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현종 때 김지남 부자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청의 땅이 될 뻔했던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는 쾌거를 달성한다. 이들은 재력이나 사회적인 면으로 공을 인정 받아 중인 신분으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6. 구한말의 역관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고 국제여행이 힘들었던 이 시대에 역관은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많은 신문물들이 역관을 통해서 전해졌다. 이렇게 역관들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구자 역할을 하며 조선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누구보다 먼저 깨우쳤다. 이들은 신분철폐 운동, 개화 사상을 싹 틔웠고 급변하는 조선 후기에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떠가는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3편: 발해는 왜 동해를 건넜는가?
1. 발해인들의 출발지

평생을 발해 연구에 몸바쳐온 블라디보스톡 종합대학의 샤프꾸노프 박사는 세계적인 발해사 권위자이다. 그가 발로 뛰어다니며 수집한 발해 유물은 발해토기에서부터 벽장식 까지 수만점으로 그의 연구실은 작은 발해 박물관이다. 이 샤프꾸노프 박사가 수집한 발해유물 중 어린아이 손가락 길이 만한 청동부절이 있는데, 이 청동부절을 통해 발해인들이 동해로 떠났던 출발지를 유추해 볼 수 있었다.


2. 겨울항해의 비밀

발해는 러시아 엑스뻬디찌야만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띄웠다. 엑스뻬디찌야는 우리말로 탐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배를 띄운 시기가 한결같이 겨울이었다고 한다. 발해인들은 왜 하필 한 겨울 시베리아벌판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북서풍을 맞으며 항해를 시작했을까? 그리고 또 어떤 배를 타고 거센 눈보라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나섰을까?


3. 정치 외교전

발해인들은 험난한 동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사신 파견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좀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한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지금으로부터 1200여년 전에 있었던 발해의 당나라 공격이다.


4. 무역 외교전

일본 후꾸이현의 마쓰바라 해안 인근에 있는 작은 신사는 발해 사신들이 묵었던 숙소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발해사신들은 한번 일본에 오면 대체로 6개월 이상 일본에 머물렀는데, 그들은 돌아가는 그날까지 일본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발해사신들은 일본에서 무엇을 했을까?


5. 해동성국 발해

발해의 수도 상경성은 그 규모의 거대함은 물론 내부의 화려한 건축양식에서도 발해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수도의 면모 뿐만 아니라 발해의 국력을 알 수 있는 또 한가지의 근거는 영토이다. 발해는 우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졌던 나라이다. 그래서 명실공히 동북아 최강국이었던 당나라는 발해를 이렇게 불렀다. 해동성국, 바다 동쪽에 있는 융성한 나라.


96편: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 회암사
1. 미스터리의 사찰, 회암사

천보산 끝자락에 자리한 회암사터는 3년에 걸친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는 일반 유물과 더불어 경복궁에 사용되는 봉황과 용이 그려진 기와, 백자접시, 잡상 등 일반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보광전 추녀끝에서 발견된 금탁이었다.


2. 회암사의 진면목

금탁은 풍경을 말하는데 13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통해 회암사의 존재
를 처음으로 확증할 수 있었다. 또 이 금탁에는 조선국왕, 왕 현비, 세자라는 명문이 나타난다. 이들은 누구일까?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회암사의 시주자를 추적하였다. 이득분이라는 내시를 거쳐 실마리는 태조 이성계에 닿았다.


3. 왕궁을 닮은 사찰

회암사는 일반 사찰의 구조와 다르다. 사찰의 중심은 대웅전이 아니라 보광전이다. 전체적인 배치와 세부적인 부분을 살펴보면 회암사는 절보다는 왕궁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암사는 태조가 자주 드나들면서 궁궐의 배치를 닮아간 이성계의 또 다른 왕궁이었던 것이다.


4. 이성계의 정신적인 은신처

회암사를 창건에 가깝게 중창한 인물은 승려 나옹이다. 그러나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1376년 입적한다. 나옹의 친구 무학은 이성계의 건국동지이기도 하다. 무학이 회암사 주지가 되고 나서 이성계는 이 절에 자주 들렀다. 이런 친분 외에 이성계가 불교로 귀의하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그는 아들과 신하를 잃는다. 이런 정치적인 소용돌이가 불교로의 귀의를 부추긴 것이다.


5. 숭유억불 시대를 역행한 회암사

다른 사찰들이 토지와 노비를 몰수당하는 동안에도 회암사는 오히려 전답과 노비를 하사 받고 250명의 승려가 머무는 대사찰로 성장한다. 그 이유는 이곳에 선대왕의 제사를 모셨기 때문이다. 조선은 종묘를 세우고도 불교방식의 옛 관습을 쉽게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또 회암사는 사용된 건축기술도 첨단적인 것이어서 과학적인 온돌구조, 철저하게 계획된 배수로 조경시설, 당시 유행하던 풍수사상까지 건축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6. 회암사의 몰락

발굴 도중 하나같이 목이 잘린 석재 불상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조선의 불교 탄압정책의 흔적이었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세상을 뜬 뒤부터 사찰을 탄압했다. 회암사가 사라진 시기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를 계기로 조선은 본격적인 유교국가로 자리잡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회암사는 불교의 마지막 화려한 불꽃이었다.

13편: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1. 미륵사 석탑의 비밀

오래 전부터 황량한 절터를 홀로 지키고 있는 미륵사탑을 본 사람들은 우선 그 규모에 놀란다. 이 탑은 돌로 만든 최초의 탑이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미륵사탑은 단단한 재질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 탑을 쌓기 위해서는 화강암을 수백장 자르고 다듬어야 했을 것이다. 익산에 있는 한 석재공장에서 탑의 기둥 한 개를 실제로 만들어 보니, 기둥 한 개를 자르고 다듬는데도 대엿새는 족히 걸린다. 그런데 미륵사에는 이렇게 힘들게 쌓아올린 탑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2. 밝혀지는 미륵사의 전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의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하룻밤 만에 못을 메우고 미륵삼존과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내용이다. 건물터 5만 여 평에 창건기간 36년으로 추정되는 미륵사. 거대한 연못을 메워 3 개의 탑과 3 개의 금당을 세운 화려하고 웅장한 사찰, 미륵사를 둘러싼 전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3. 서동요의 주인공, 무왕

‘선화 공주님은 밤마다 몰래 서동을 품에 안고 잔다’의 서동요. 서동과 선화 공주의 결혼을 가능하게 했다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백제 무왕이다. 그리고 서동요속에는 당시 백제와 신라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늦추는 정략적인 화해가 담겨있다.


4. 삼금당의 비밀

호방하고 걸출한 영웅이었던 무왕은 미륵사라는 거대한 절을 짓는다. 이 미륵사에서 미륵과 용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용수’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이다. ‘용수’는 늪에 사는 용을 의미한다. 용의 화신이 미륵을 기다리는 간절한 염원이 미륵사 안에 그대로 담겨져 있다.


5. 미륵사가 있는 익산. 그 공간에 담겨진 비밀

미륵사가 세워진 익산에는 무왕과 선화 공주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있다. 무왕에게 익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백제 역사상 무왕만큼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한 왕은 없었다. 무왕은 무려 12번이나 신라를 침공했는데, 익산은 가장 적합한 공격의 전초 기지였다. 이 전초기지 익산에 무왕은 백제의 국력을 결집시켜 미륵사를 창건했다. 전초기지와 대사찰, 익산과 미륵사의 관계를 풀 수 있는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1편: 영상복원 - 무용총 고구려가 살아난다.
1. 무용도의 복원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중국 집안지역 일대에는 1만2천여 기에 달하는 고구려 무덤들이 거대한 고분군을 형성하고 있다. 그 고분들 속에 쌍둥이 무덤이라고 알려진 각저총과 무용총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무용총은 외부 공개 이후 보존 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벽화의 훼손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이 무용총 벽화를 3차원 최첨단 영상으로 재현했다.


2. 접객도의 복원

화려한 벽화를 남긴 무덤의 주인공을 추측할 수 있는 벽화가 접객도이다. 접객도는 음식이 차려진 탁자를 사이에 두고 손님과 주인공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한쪽 무릎을 꿇고 음식을 올리는 시종 위로 주인공이 당시 귀족들의 머리장식으로 알려진 백라관을 쓰고 앉아있다.


3. 돌 위에 그린 섬세한 그림

무덤은 돌로 지어졌기 대문에 벽면이 대단히 거칠다. 그런 벽면에 어떻게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 또 어떻게 고구려 벽화가 1500년 가까이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는지 그 비밀을 밝힌다.


4. 수렵도의 복원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호방한 고구려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수렵도. 사냥은 모든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오락이자, 그들의 생활이었다. 수렵도에 그려진 사냥꾼들은 저마다 머리장식이 다르며 무사들의 활쏘는 자세도 예사롭지 않다. 또한 사냥꾼들의 화살은 마치 석류모양처럼 생겼다. 어떻게 저런 화살로 사냥을 할 수 있었을까?


5. 하늘 세계의 파노라마

무용총 천장의 벽화에는 네 벽에 그려진 그림과 확연히 다른 찬란하고 다양한 하늘세계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벽면의 벽화가 살아 생전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면, 천장 부분은 극락왕생을 비는 영혼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인들의 무덤은 산자와 죽은 자가 헤어지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죽은 자가 신선으로 다시 환생하도록 이어주는 곳이다.


6. 별자리

무용총에는 북두칠성, 남두육성과 같은 별자리와 청룡, 백호 등의 사신 그리고 해, 달이 늘 함께 나타나는데 이것이 고구려 천문도의 특징이다. 동서남북을 나타내는 별자리는 대개 백호나 청룡 같은 사신과 함께 그려져 있다. 또한 붉은 빛 해 속의 검은 빛 까마귀와 흰빛 달 속에 엎드려 있는 두꺼비는 각각 해신, 달신을 의미한다.

15편: 거북선 머리는 들락거렸다
1. 머리가 들락날락하다

임진왜란 당시 태자를 수행한 이덕홍이 광해군에게 올린 한 상소문에 간략하게 그려진 귀갑선도라는 거북선 그림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귀갑선을 가지고 이순신 장군이 적을 물리쳤는데, 그 귀갑선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하는 내용이다.


2. 또 하나의 머리, 귀두

거북선에는 용머리가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용머리 밑에 또 하나의 머리가 있었다. 이 다른 하나의 머리는 그 머리 위에 도깨비 얼굴이 새겨져 있어 도깨비 머리라 부른다. 당시 도깨비 그림은 복을 부르고 재앙을 내쫓는 수호신처럼 쓰여졌기 때문에 생활 곳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도깨비 머리는 재앙을 내쫓는 수호신의 의미가 아닌 왜선을 최후에 제압할 수 있는 비밀 병기였다.


3. 쇠못을 꽂은 거북선

거북선이라 이름 붙이게 된 거북선의 덮개. 거북선의 좌우, 양쪽 측면을 따라 긴 나무판자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 쇠못을 촘촘히 꽂은 것이 거북선의 덮개이다. 그리고 쇠못을 꽂은 덮개 위에 이엉이나 거적을 덮어 멀리서 보면 고깃배인지, 초가집인지 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도록 위장했다. 또한 이 위장망은 쇠못이 박혀있는지 모르고 배 위로 뛰어든 왜군들에게 치명상을 입혔고, 적군의 화살을 붙잡아서 나중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도 했다.


4. 거북선의 3층 구조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 전서의 거북선을 실제크기로 만들어놓은 거북선의 안을 들여다보면 포를 쏘는 구멍과 노가 같은 위치에 있다. 그래서 노를 저을 때는 포를 쏠 수가 없고 포를 쏠 때는 노를 젓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결국 배가 정지 상태일 때만 포를 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거북선은 포를 쏘며 적진 속으로 들어가는 돌격선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도 전투원이 사면으로 포를 쏘면서 가로세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나는 듯이 빨랐다고 전하고 있다. 이 거북선에는 민첩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던 비밀이 숨어있다.


5. 거북선은 이렇게 싸웠다

‘도망가는 척하던 거북선이 갑자기 방향을 180도 꺾고 적진을 향해 돌아선다. 그리고 거북선의 큰 용머리가 들락거리며 사정없이 적진 속을 헤집고 다니면서 총을 쏘아대고, 왜선 가까이 다가간 거북선은 앞으로 무섭게 돌격, 도깨비 머리로 왜선을 박살 낸다.’ 400여년 전 이땅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던 거북선. 그 거북선의 신화를 확실한 역사로 돌려놓는 일은 우리들의 관심에서 시작될 것이다.

37편: 허준은 과연 스승을 해부했을까?
1. 동양 3국의 베스트셀러 -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당시 동양의학 전체를 간편하게 종합해 정리한 의학 백과사전이다. 무엇보다도 동양의학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을 훨씬 능가하는 획기적인 결과물이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동의보감은 백성을 보호해주는 신선의 경전이요, 의사들의 비법을 담은 문서’라고 극찬을 했다. 이 동의보감은 편찬당시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앞 다투어 발행되면서 세계성을 얻었다.


2. 허준의 인체지식

동의보감의 첫 페이지에는 인체해부도로 인체의 장기와 각각의 특징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동의보감의 장기 묘사는 거의 정확하여 해부를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 매달린 박같이 생겼다고 묘사한 쓸개에 대한 관찰은 현대의학에 비추어봐도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또 동의보감엔 상당한 수준의 외과적인 치료술도 담겨있다.


3. 허준은 스승을 해부했을까?

허준의 뒤에는 자신의 몸을 해부하도록 내준 한 스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유교적 소양이 높았던 허준이 당시 우리사회의 윤리의식이나 정서에 상관없이 스승의 몸을 해부할 수 있었을까?


4. 유의태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허준의 스승은 경상도 산청의 유의태이다. 유의태의 흔적을 쫓던 취재진은 같은 지방에서 비슷한 이름을 가진 명의 유이태를 찾을 수 있었다.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며 백성들을 진료한 유이태는 중국천자의 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을 만들어낸 대단한 의사였다. 그럼 허준의 스승으로 알려진 유의태가 바로 이 유이태를 말하는 것일까?


5. 허준은 누구인가?

젊은 시절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한 허준은 서울의 양반들 사이에서도 의술이 뛰어나다는 칭송이 자자했었다. 이후 허준은 내의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의술이 점점 깊어지며 서서히 전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허준은 의서를 편찬한 후 동의보감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중국의 <북의>나 <남의>에 버금가는 결과물이라는 당당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6. 민중의 의사 허준

허준은 결코 소외된 일반 민중을 잊지 않았다. 동의보감의 탕액편을 보면 650여 가지의 약재 이름이 한글로 나란히 적혀있다. 또 동의보감에서 처방하는 주요약재의 90%가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약재들이었다. 오로지 의술의 한길, 그 곧은 삶을 통해 허준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다.

77편: 고려개국의 예언서, 도선비기는 실재했나?
1. 도선은 실재 인물인가?

전남 광양의 옥룡사터. 1997년, 이곳에서 묘자리가 발견되었다. 부도를 설치하고 2차장을 하는 사골장이었는데 이는 명망 높은 고승의 매장법이었다. 석관 해체 과정과 주변 출토 조사를 통해 그것은 천년 동안 잠들어 있었던 도선국사 묘로 확인되었다.


2. 선종불교의 맥을 잇는 도선

참선과 수행을 통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은 실천성이 없는 불교를 실천으로 이끄는 혁명적 이론이었다. 15세에 출가한 도선은 스승 혜철대사를 통해 선종에 입문한다. 서른 일곱 되던 해 그는 옥룡사를 중창하고 모여드는 제자를 거두어 들이기 시작했다.


3. 베일에 가려진 도선비기

도선은 고려시대에 들어 의상, 원효와 함께 국사에 봉해지는데 그 핵심적 이유는 도선비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후대인들이 부풀리고 과장 시켜 그 원형을 알 수 없으나 실재했다고 보여진다.


4. 도선의 풍수사상 - 비보

도선이 세운 옥룡사터는 풍수상으로 치명적 약점을 갖는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선은 동백숲을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명당을 만들고 있다. 땅을 고쳐 보완한다는 이런 이치가 도선의 핵심 사상인 비보사상이다. 왕건은 이를 국가창건에 받아들인다.


5. 왕건에게 전해진 비보사상

도선이 왕건의 등장과 후삼국 체제를 예견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후대에 미화됐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왕건은 측근을 통하여 도선의 사상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혼란기 민심을 모으고 국가를 통합하는 구심을 세워야 했던 왕건에게 풍수와 불교를 아우르는 도선의 비보는 진정으로 필요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87편: 개천절 기획2부작 제1편 - 비밀의 왕국 고조선
1. 단군의 흔적

고조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단군. 과연 그는 누구였을까. 단군신화가 담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무엇인가. 평양시 대박산 기슭에는 단군릉으로 불려지고 있는 무덤이 있다. 무덤의 내부는 1993년에 공개됐는데 무덤 속에서 두 사람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북한의 학자들은 이들을 단군 부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2. 고조선의 열쇠 - 비파형 동검

부여 송국리에서 발굴된 2500년 전의 청동기시대 마을에서 비파형 청동검이 발견되었다. 이 비파형 동검과 함께 출토된 청동기는 중국 청동기문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중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 그것은 바로 비파형동검을 사용했던 고조선 시대의 문화였다.


3. 중국대륙 세력권

단군이라는 최고 지배자가 있었고 또 청동검을 사용했던 지배계층이 존재했던 고조선은 과연 어디였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취재진은 고조선의 유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물, 비파형 동검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우선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었다고 하는 중국 조양시의 한 외곽마을에 있는 청동기 유적을 찾았다.


4. 청동단추의 비밀

중국 심양시, 비파형 동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알려진 정가와자 유적. 안타깝게도 이 유적지는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발굴사진을 통해 유물의 출토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중 눈길을 끄는 모습이 하나 있었는데, 인골의 발 부분에 수많은 청동단추가 놓여있는 것이다. 왜 하필 청동단추가 발 부분에 놓여있을까. 그런데 이 청동단추는 내몽고 자치주 적봉에서 한반도 남부까지 폭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5. 군사력

한 나라의 국력을 가늠하는 잣대 중의 하나가 군사력이다. 국내 최대의 청동기 유적인 진주 남강 유적의 인골과 함께 출토된 유물들의 상당수는 칼과 도끼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다. 그 중에서 특히 많은 것이 화살촉이다. 그리고 화살을 멀리 보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도 있었다. 또한 고조선 유적에서는 청동단추로 장식한 청동투구도 발굴되었다. 그렇다면 갑옷으로 무장한 고조선의 군사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6. 고조선의 성(城)

고조선의 독창적인 유물이 발견된 무덤 떼 주변에 성터가 발견되었다. 수많은 무덤 떼의 주인공들이 바로 이 성 안에서 살던 주민이었던 것이다. 성안에서 발견된 집 자리는 모두 200개에 이른다. 당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사회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조선의 성터는 모두 60여 기에 이른다.
70편: 제3의 세력, 내시
1. 내시들에게는 공동묘지가 있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버려진 무덤 - 그것은 내시들의 공동 묘지였다.
후손들은 내시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했기 때문에 내시들의 무덤은 없어지거나 훼손된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왕을 모시며 궁궐에서 근무하는 벼슬 높은 관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네에서 가장 큰 어른으로 대접 받았다. 그러나 내시들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그 존재까지도 점점 잊혀져 갔다.


2. 내시들의 후손을 찾아

신체적으로 불구였던 그들이지만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내시들은 분명 부인과 자식이 있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내시는 양자를 들여 후손을 이어나갔다. 그 가계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3. 내시도 출퇴근을 했다

내시가 궁궐에서 생활하다 궁에서 생을 마쳤을 거라는 사람들의 상식과는 달리 내시부는 경복궁 바로 옆 지금의 효자동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하여 궁 밖에 있었다. 왕실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 내시부는 궁궐로 파견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를 내반원이라 하였다.


4. 내시, 그들은 누구인가?

중국의 경우 내시에 대한 기록은 3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리나라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 처음 등장한다. 당시 내시는 신성한 존재와 속세의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자, 거세를 통하여 욕망을 극복한 자들로서 황제의 신성함을 높이기 위해 필요했다. 궁형이 없던 우리나라는 갖가지 방법으로 내시가 충원되었는데 개중에는 사설 양성소까지 있었다고 한다.


5. 제3의 권력 - 내시

왕과 가까이 있으면서 내시는 궁중 내의 많은 정보를 독점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치적 혼란기에는 이들이 관여될 여지가 많았다. 특히 극비에 속하는 정책,간첩,국제첩보에 관한 사항에 내시들이 간여한 경우가 많았다. 또 부를 축적할 기회도 많았는데 이는 왕실의 재산관리, 각종 공사 등을 이들이 맡아서 했기 때문이다.


6. 내시에 대한 오해

내시 김계한은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걸고 선조를 구해냈다. 그 공을 인정하여 공신에 봉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이처럼 분명한 공을 세웠는데도 내시라는 이유로 그들의 권리가 무시되었던 경우는 태반이었다. 역사는 그들을 비하하고, 분란을 일으킨 행적만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궁중의 사람으로 자기 직분에 충실했던 수많은 내시들이 있었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내시는 천년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역할은 변형된 형태로 현재도 여전히 남아있다.

67편: 조선시대에도 자유부인이 있었다
1. 남편과의 이혼

감동은 남편을 따라 무안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당시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그 지방에서는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병을 핑계 삼아 한양으로 올라온 감동은 당시 사대부 집 여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연애를 누리게 되고, 그 결과 그녀는 남편에게 일방적인 이혼을 당하게 된다.


2. 조선시대의 이혼제도

조선시대에도 이혼제도가 있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국가가 개인의 이혼문제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으며, 불가피한 상황 외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3. 이혼이 성행했던 세종시대

이혼을 하려고 해도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조선시대. 그런데 감동이 살았던 세종시대에는 유독 이혼과 간통 사건이 많았다. 정치적 안정기일 뿐 아니라, 사회가 안정되고 유교 체제를 갖춰가던 세종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4. 뒤바뀐 삶

유감동은 철저한 정절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의 첩으로 행세하기도 하고, 창기로 행세하기도 하면서 문란한 생활을 일삼는다. 감동이 스스로 신분을 속인 이유는 이렇다. 사대부 집 여자라는 사실일 밝혀지면 자신에게도 피해가 미칠 뿐 아니라 감동과 관계를 한 남자들에게도 큰 벌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유감동은 단순히 자신의 욕정을 다스리지 못해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5. 용서 받지 못할 간통죄

감동의 경우. 분명 이혼 당한 여성, 즉 남편이 없는 데다가 스스로 창기라 칭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죄가 성립했다. 간통죄는 다른 죄와는 달리 시대의 흐름이나 국가마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죄의 성립 조건이 매우 다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간통은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으며, 현재의 간통과의 어떤 차이점이 있고, 그에 따른 형벌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보자.


6. 조선 여인들의 명예 - 열녀

조선 전기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이혼녀보다는 유교 사상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열녀들의 숫자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죽음에까지 이르는 극단적인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조선 여인들의 열녀가 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7. 어우동

지난 천 년 최고의 스캔들 메이커로 손꼽히기도 했던 어우동. 어우동은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며느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은 그릇을 만드는 공인과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친정 집에서 슬픈 세월을 보내고 있던 어우동. 마침내 어우동은 자유로운 여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름을 현비로 개명한다.

84편: 고려 말 왜구는 정예부대였다
1. 기록 속의 왜구

왜구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취재진이 처음 찾은 곳은 도쿄.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는 왜구와 관련된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철제문을 열고 수장고로 들어가니 안쪽에 삼나무로 만든 상자형태의 방이 나왔다. 그리고 몇 개의 나무상자를 열고 몇 겹의 천을 펼친 후에야 취재진은 그 자료를 볼 수 있었다.


2. 왜구의 전술과 일본 무사

고려말 왜구들은 무역이나 약탈을 위해 고려 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쳐들어 갔다. 왜구의 지휘관 장수들은 완벽한 무장을 했고, 선박기술과 병력도 단순한 도적떼의 능력이 아니었다.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은 평소에 훈련이 얼마나 치밀했던가를 보여준다.


3. 쌀과 재물을 달라

왜구들은 쌀과 재물을 모아둔 고려의 해안가 조창을 집중공격 한다. 이에 고려는 조창을 내륙으로 옮겼는데, 왜구도 옮겨진 조창을 따라 내륙 깊숙이 까지 침입한다.


4. 돌아오지 않는 새신랑

왜구는 저항하는 아녀자의 팔다리를 자르고 살해할 정도로 잔인했다. 그러나 왜구가 주로 노린 것은 부녀자보다는 젊고 힘센 장정들이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왜구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수가 3만여 명에 이른다. 일본으로 잡혀간 장정들은 죽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5. 일본에 널린 고려 문화재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되는 대마도에는 고려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또한 대마도 곳곳에는 고려의 문화재들이 수없이 널려있다. 중국도 흉내낼 수 없었던 고려불화는 지금 전 세계에 100여 점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 90여 점이 일본에 있다.


6. 왜구의 정체

일본 역사상 최대의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혈투에서 패한 후쿠오카 통치자 쇼니는 큐슈에서 세력을 잃게 된다. 쇼니가 재기할 꿈을 다진 곳은 대마도와 바다 건너 고려였다. 취재팀은 이 쇼니와 왜구와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


7.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

최무선이 화포를 개발한 목적은 왜구 격퇴를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왜구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국민적 영웅이 된다. 또한 조선건국의 결정적 계기였던 위화도 회군의 명분도 왜구였다. 그리고 그눈 왜구토벌 과정에서 민심과 권력을 거머쥔다.
25편: 대원군이 만든 459장의 보물지도
1. 그림지도는 보물지도다

지도 속의 충청도 연산에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다. 하천가에 둥근 모습으로 그려진 가마솥인데, 현재 충청도 개태사에 이 솥이 정말 있었다. 그것도 전각에 소중하게 보관되고 있다. 또한 지도상에 그려진 가마솥의 크기와도 비슷하다. 그리고 대원군의 지도에는 항아리 모양으로 그려진 태실이 눈에 띄는데, 크기를 달리해서 위계까지 나타내고 있다. 이 지도를 통해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 방치됐던 고려태실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2. 조선의 읍성

459장의 지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그려진 전라도 남원지도는 어느 지도보다도 담겨진 내용이 상세하고 풍부해서 마치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이 지도가 얼마나 산수화와 비슷한지, 지도 속의 건물들이 빠지면 산수화가 되고, 다시 건물들이 들어가면 지도가 될 정도이다. 따라서 읍성들이 산수화인지 그림지도인지를 구별해 주는 부분인데, 지도 속의 읍성은 활짝 핀 꽃의 꽃술처럼 중앙에 크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꽃술 속에 조선읍성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숨어있었다.


3. 광한루 동림(東林)

춘향의 정절과 함께 남원의 상징인 광한루 옆에는 울창한 숲이 보이는데, 동쪽에 있는 숲, 동림(東林)이란 글씨가 쓰여 있다. 그리고 이 숲의 나무들은 줄기와 가지까지 아주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광한루의 동림은 버드나무를 심어 인공적으로 숲을 만든 것인데, 이 버드나무에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멋이 담겨있다. 지금도 광한루 주변에서는 동림교라는 다리와 동림곱창집등 동림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4. 지도에 최초로 나타난 시장

전국적으로 이름났던 5일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시장의 발달은 도로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도 속에는 시골 구석구석 존재했던 시장의 모습과 연결 도로들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게다가 도로의 거리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시장이 이렇게 지도에 표시된 것은 처음인데, 지도에 이런 것들이 나타날 정도로 변화된 경제 상황과 민의 성장을 알 수 있다.


5. 그림지도는 국방지도였다.

그림지도가 제작되던 1872년의 조선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무력으로 서구 세력들이 밀려왔고,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459장의 그림지도 곳곳에는 대원군의 국방강화 노력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지도에 그려져 있고, 서양배들이 지나간 대부도 지도에는 육로와 해로, 각 섬들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고, ‘이양선이 지나간 자리’라는 설명도 있다. 그리고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도 지도에 그려져 있다. 또한 광양현, 함평지도에는 배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어, 당시 조선 배들의 다양한 종류와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해남, 진도, 순천지도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어, 1872년에도 거북선이 중요한 전선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7편: 추적! 임나일본부의 정체
1. 광개토대왕비문 조작시비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여기에 쓰인 1800자는 현존하는 우리 역사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본은 일부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고, 정인보는 그 반론을 펴기도 했다. 그런데 1972년, 한 재일사학자에 의해 광개토대왕비문이 일본군인에 의해 변조됐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후 각 국의 학자들이 재반론을 거듭하면서 아직까지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2. 거듭되는 논란

문제가 되는 비문 구절 바로 다음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또 당시 고구려가 신라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키고 백제를 복속 시켰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왜의 속민이 되었어야 할 백제가 다시 고구려에 공격 당한 것이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광개토대왕비는 임나일본부설이 아니라 고구려 정복전쟁의 역사와 통일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가치를 지닌 비인 것이다.


3. 임나일본부와 안라국

일본서기가 주장하는 임나일본부 또는 안라일본부는 경남 함안에 있었던 것으로 주장되는데, 이곳 안라국은 해상교역의 요충지였다. 얼마 전 이곳에서는 국내최초로 철제마갑이 출토되었다. 안라국의 위력이 상당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700년을 이어온 안라국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다.


4. 일본서기에 나타난 임나일본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는 임나일본부의 주석으로 ‘어사지’ ‘미코토모치’라는 말을 달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신을 일컫는 말이다. 백제와 신라의 공격에 시달리던 안라국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일본에 이주한 동족들의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다시 가야 땅으로 온 이들을 일본서기는 사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고대일본의 안라국에 대한 관심

가야는 각종 철기들이 발전한 나라다. 고대국가를 형성하고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철은 필수적인 요소였고 또 안라국은 해상교역의 요충지까지 끼고있는 최적의 중개무역 기지였다. 일본은 그래서 안라국에 관심이 많았다. 가야는 철과 선진문물을 일본으로 수출하여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6. 허구의 역사

임나일본부의 정체를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철과 선진문물을 원했던 일본과 고대 한국간에 이루어진 역사다.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는 일부 일본인들이 집착하는 임나일본부설. 그 왜곡된 역사는 언덕을 넘어선 수레의 운명이다.


73편: 북녘땅 고구려 고분벽화 무엇을 그렸나?
1. 고구려의 주거와 식생활

평안남도 대안시에 있는 덕흥리 고분은 5세기 초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덕흥리 고분
은 입구로 들어가면 먼저 널길이 나오고 그 뒤로 방이 있는 복잡한 구조이다. 그리고 벽면은 온통 그림으로 빼곡하다. 벽의 그림은 무덤 주인공의 생전 모습을 담은 것으로 이런 벽화를 인물 풍속도라 한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집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고구려인들의 흔적들이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2. 고구려의 놀이문화와 여가생활

덕흥리 고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안남도 강서군의 수산리 고분 역시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분의 내부는 하나의 널방으로 된 단순한 구조이다. 이 수산리 고분의 벽화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외출 장면이다. 시종을 거느리고 나들이에 나선 귀족이 뭔가를 유심히 보고 있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서커스이다. 함께 따라온 시종들도 흥미진진한 표정이다. 이밖에도 벽화에 새겨진 고구려의 놀이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3. 고구려의 복식(服飾)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분은 고구려의 고분 중 큰 규모에 속한다. 내부도 복잡해서 널길로 들어가면 널방 입구 양쪽으로 작은 곁방 두 개가 있다. 이 무덤 벽화의 인물들은 화려하고 격조가 있다. 주인공은 위엄 있는 차림새로 앉아있고, 부인인 듯한 여자는 머리 모양과 옷차림에 잔뜩 호사를 부렸다. 그녀 옆에 있는 시녀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독특하고 다양한 패션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4.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

안악3호분의 행렬도는 가장 많은 병사가 등장하는 벽화이다. 수레를 탄 주인공의 출행장면을 그린 이 행렬도는 등장하는 인물만도 무려 250명에 달한다. 이 행렬도에서 주인공을 둘러싸고 행진하고 있는 무사들을 보면 한때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로 이름을 날렸던 고구려 군사들의 힘을 느낄 수 있다.


5. 벽화의 비밀

노랑, 빨강, 초록 등 지금도 선명한 색상을 유지하고 있는 고분벽화는 대략 1500년 전에 그려진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비밀은 무엇일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쌍영총 벽화 조각이 한 점 보관되어 있다. 쌍영총은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5세기 말에 축조된 무덤이다. 이 쌍영총 벽화 조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니 단면에서 붉은 색과 검은 색의 안료가 나타났다.


6. 강서대묘 내부와 사신도(四神圖)

북쪽의 신 현무는 암컷인 거북과 수컷 뱀이 서로 엉켜있는 북쪽의 신 현무, 서쪽의 신 백호, 남쪽을 대표하는 주작, 동쪽의 신 청룡. 이 네 동물의 그림은 고구려 회화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며 벽화예술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갔을 때 찾아갔던 평안남도 남포시에 있는 강서대묘.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7. 천하의 중심, 고구려

수준 높은 예술과 강성했던 고구려의 국력. 그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를 호령하며 아시아 곳곳에 발길이 미쳤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당당한 삶의 자세와 자신감을 보여왔다. 고구려 벽화는 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20편: 영상복원 - 해상왕국 고려의 군함
1. 700년 전 일본의 기억

일본의 하이타마현 박물관에서 전시된 '몽골습래회사' 라는 그림에는 700년 전 일본에게 패배를 안겨 준 고려, 몽고 연합군과의 전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1차 원정 때 연합군은 단 하루 만에 큐슈 일대를 휩쓸어 버리며 일본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이듬해 일본은 고려, 몽고 연합군의 침략을 대비해서 방루를 쌓는데, 그 이름도 몽고방루이다. 그런데 유목 민족인 몽고가 어떻게 바다를 건너 일본을 원정할 수 있었을까?


2.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발견되는 통나무와 마을 뒷산에 있는 울창한 소나무 숲. 전북 부안군 구진 마을에는 조선소가 있었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춘 구진마을은 고려인들이 군함을 만들며 일본 원정을 준비했던 마을이다.


3. 신의 바람 카미카제를 이긴 고려 군함

1281년 여몽연합군은 일본 2차 원정에서 대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 여몽연합군을 물리친 주역은 일본이 아니라 신의 바람이라 불리는 카미카제였다.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원사에는 ‘원나라 전선들은 모두 돌풍에 깨졌으나 고려의 배는 대부분 무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4. 고려군함 복원

고려의 군함 복원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고증된 사실을 토대로 정확한 설계도를 그리는 일이다. 먼저 과선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과선은 실제 해전에서 그 위력을 톡톡히 발휘한 고려의 대표적인 군함이다. 이어 완성된 과선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운동장에 실제크기의 대선을 세웠다. 고려에 대선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배위에서 말을 달릴 만했다고 하는데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5. 고려군함에 사용된 무기들

일본 고기록 소우기는 '고려전함은 돌에 화약을 넣어서 적선을 부순다'라고 적고 있다. 고려 군함에서 사용된 강력한 무기 중에 적선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불화살 주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화살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화포였다. 고려는 까다로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세계최초로 군함에 화포를 설치했다.


6. 해군사령관 왕건

고려가 동북아 최고 수준의 군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과학적이고 뛰어난 조선술 외에도 다른 배경이 존재한다. 바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새 왕조를 건설한 왕건이다. 왕건의 조상은 대대로 해상무역을 벌인 해상 호족세력이었다. 따라서 해상 호족출신인 왕건은 철저하게 바다를 이용할 줄 알았다.


7. 해상무역이 가져다 준 풍요

고려는 성능이 우수한 군함을 바탕으로 바다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 힘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역을 벌이며 국제적으로도 우세한 지위를 확보했다. 고려는 동북지역, 일본, 중국의 북,남부,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항로를 가지고 있었고 이 해상무역은 고려에 풍요로움을 안겨주었다.

98편: 사라진 보물창고, 외규장각
1. 120년만에 등장한 외규장각

1866년 11월 19일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은 프랑스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그러나, 1993년 미태랑 대통령이 고속철도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외규장각의 약탈한 책들 중 한 권을 반환하면서 외규장각의 존재도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 책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묘소 휘경원 조성사업을 기록한 ‘휘경원 원소도감의궤’였다.


2. 둘도 없는 보물, 어람용 의궤

의궤는 의식과 궤범이라는 뜻이다. 즉 중요한 의식이 있으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국가 의식을 치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의궤 자체 값어치도 크지만 프랑스에 가있는 의궤는 의미가 각별하다. 의궤는 보통 관청에서 보관하는 분상용과 왕실보관용으로 어람의궤가 있다. 현재 국내에는 분상용만 남아있는데 비해 프랑스에 가있는 것은 어람용 의궤인 것이다.


3. 조선 왕조 최고의 보물 창고, 외규장각

정조가 규장각을 세웠던 이유는 당쟁으로 인한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규장각을 새로운 정치기구로 이용하고자 함이었다. 정조 자신의 상징물을 보관하고 국내외 수많은 서적들을 망라해 정책을 수립하고 결정했던 규장각은 왕권의 상징이자 핵심 권력 기관이었다. 그러던 중 다시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만든다. 그것은 영원히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들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함이었다.


4. 최고의 보관처, 강화도

정조는 이렇게 귀중한 물건들을 왜 강화도에 보관했을까? 강화도는 이미 고려시대 몽고군에 맞서 40년간 항쟁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 난리가 일어날 때 국왕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특히 물살이 급한 해로와 드넓은 개펄이 있어 천연의 요새다. 정조는 이런 강화도야 말로 최고의 안전지대라 믿고 외규장각을 설치했던 것이다.


5. 영상복원, 외규장각

강화군은 5년 전부터 외규장각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70년대 고려궁지를 성역화 하면서 졸속으로 세운 담장 때문에 발굴작업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난관 끝에 최대한 고증에 입각한 외규장각이 영상으로 복원되었다.


6. 외규장각은 왜 그렇게 쉽게 불탔는가?

프랑스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할 때 병력은 군함 7척에 군인 1460명이었다. 이들 앞에 수대에 걸쳐 외성과 내성을 쌓고 거기에다 돈대까지 쌓은 강화도는 의외로 허무
하게 무너진다. 당시 정규군은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 프랑스군은 무력으로 손쉽게 강화를 점령했지만 조선 사람들의 문화수준에는 감탄한 나머지 자존심이 상할 정도였다고 한다.
6편: 조선 최대 정치 이벤트 - 화성 회갑잔치
1. [원행을묘정리의궤] 그리고 후면도

서울대학 규장각에는 당시 정조의 행차를 볼 수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원본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또 화성행차 당시 누군가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5미터 길이의 행렬 후면도가 하나 더 있다. 훼손 상태는 심하지만, 화려한 채색을 한 행렬의 뒷모습을 통해 정조행차의 복장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행렬도 역시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정조 행차의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2. 화성행차 당시의 정치관계

회갑잔치 행차에 마치 도성의 행정체계가 모두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행렬 속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한 사람 빠져 있다. 바로 정조의 비인 중전이다. 시어머니의 회갑잔치에 며느리인 중전이 참석하지 않고 창덕궁에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화성행차 당시의 정치관계가 얽혀 있었다.


3. 화성의 의미

스물 여덟의 한창 나이에 아버지 영조의 지시로 뒤주에 갇힌 지 8일만에 굶어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동갑이었기 때문에 정조에게 이 행차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화성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화성에서 회갑잔치를 하려는 것은 어쩌면 정조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회갑잔치 행차로 보기에는 그 행렬의 규모가 너무나 크다. 더욱이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미묘한 시기였다.


4. 대규모 군사훈련

화성행차 당시 정조의 행적을 담아 놓은 여덟 폭의 병풍을 살펴보면 정조의 화성행차 목적이 분명해 진다. 이 병풍 그림은 정조가 화성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는 과정을 담아 놓은 것이다.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하러 가서 대규모의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이것은 매우 엉뚱한 일처럼 보인다.


5. 신분을 초월한 양로잔치

정조는 행차 마지막 날 노인들을 초대해서 양로잔치를 열었다. 화성에 거주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또한 정조의 행차 길에는 언제나 꽹과리가 울리고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민원을 제기했다. 그리고 정조는 그 자리에서 바로 백성들의 민원을 청취하고 해결해 주었다. 정조는 어떤 정치를 꿈꾸었던 것일까?


6. 화성행차 결산 보고서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화성행차 결산 보고서이다. 놀랍게도 정조는 이 보고서에 자신이 먹은 밥값까지 기록해 놓았을 정도로 화성행차의 전모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행차의 전모를 이처럼 투명하게 기록하여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제작하기까지는 6개월이나 걸렸다. 정치적 기록은 정치행위에 대한 공개성, 투명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회원리뷰 (0건) 회원리뷰 이동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판매자 배송
  •  택배사 : 대한통운택배 (상황에 따라 배송 업체는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배송비 : 무료배송
배송 안내
  •  판매자가 직접 배송하는 상품입니다.
  •  판매자 사정에 의하여 출고예상일이 변경되거나 품절이 발생될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절판 상태입니다.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