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진은 그동안 습작만 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책을 냈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조촐하게 내리는 비와 순하게 부는 바람을 좋아한다. 잘 내린 커피와 향 좋은 차가 주는 기쁨을 알고 조용한 음악과 가벼운 책이 주는 위로에 고마워한다. 오후 세 시에는 꼭 누군가를 생각하고 오래 품은 소망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사도세자)가 그 아버지(영조)에 의해 죽는 것을 보고 자란 정조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 속에 누구도 믿지 않는 고독한 왕이었다. 임금은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자신의 오랜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수원에 화성을 짓기로 한다. 그런 그에게 나타난 희대의 천재, 김태윤. 남인 서얼 출신에 골수 서학(천주교)쟁이인 그에게 임금은 아끼는 호위무관인 차정빈을 붙여 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튼튼한 성을 지어보라고. 태윤과 달리 정빈은 조선 최고 무인가문의 후계자다. 거기에 더해 절대무공과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다정다감하고 싹싹한 성품의 태윤은 정빈과 친해보려고 애쓰지만 냉정한 정빈은 무시로 일관한다. 그런 둘 사이를 이어주는 건 정빈의 집 무원당(無怨堂) 정원을 가꾸는 노비 유겸이다. 아이는 천주학을 하는 집안이 괴한의 침입으로 풍비박산 난 후 혼자 살아남아 정빈의 별당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세상과는 단절된 채 꽃과 나무를 돌보며 사는 유겸의 소망은 언젠가는 연경으로 가서 신학(神學)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는 것이다. 유겸과 정빈에게는 출생과 성장의 비밀이 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지극한 비밀이다. 여기에 정빈과 어렸을 적 함께 어울렸던 세자와 당대 권력을 풍미했던 노론의 소장파 핵심 심일재, 사랑을 갈구하는 여인 영신의 이야기가 얽혀든다.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간절한 그리움과 백성에 대한 사랑이 담겨 수원화성은 차츰 모습을 갖춰간다. 설계와 시공을 맡은 태윤은 정조의 이념적 지향을 제 비밀한 믿음에 담아 탐미의 극치인 성을 쌓아간다. 거기에 유겸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잠언처럼 지친 영혼을 위로한다. 조선 상단(商團)을 주름 잡고 있는 자운향이라는 여인, 그리고 차정빈의 아버지 차원일, 그 둘의 뒤에 서서 아는 듯 모르는 듯 움직이는 정조, 서학의 뒤를 쫓는 노론의 가혹한 공세의 이야기가 이어 펼쳐진다. 전체 스토리의 축을 이루는 정빈과 유겸의 애틋한 사랑, 태윤의 우정은 결국 서학을 탄압하는 노론의 혹심한 칼끝에 선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까. 아마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책은 죽음보다 깊고 운명보다 질긴 사랑의 원형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