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흰색이어도 멥쌀 같은 흰색이 있고, 갓 지은 백미 같은 흰색이 있다는 것을 금택은 알았다. 배꽃 같은 흰색이, 달걀 껍데기 같은 흰색이, 두부 같은 흰색이 있다는 것을. 멥쌀 같은 흰색에는 옅은 밤빛이, 갓 지은 흰색에는 초겨울 새벽녘의 푸른빛이, 배꽃 같은 흰색에는 노란빛이 미미하게 감도는 연둣빛이, 달걀 껍데기 같은 흰색에는 탁하고 흐린 분홍빛이, 두부 같은 흰색에는 살굿빛에 가까운 노란빛이 감돌았다.
--- p.11
어머니는 금택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침묵에 잠겼다.
어머니를 닮고 싶은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머니를 완벽하게 닮는 것이 금택은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어머니를 그토록 닮고 싶어 하면서도, 자신이 어째서 어머니를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
어머니의 여러 모습 중 금택이 가장 닮고 싶은 모습은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누비대 앞에 앉아 누빌 선을 따라 바늘 땀을 떠 넣는 어머니의 모습을 금택은 가장 닮고 싶었다.
--- p.61~62
금택은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바늘을 심장에라도 찔러 넣고 싶었다. 그래야만 바늘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서 놓여날 것 같았다. 밤에 잠을 자다가도 금택은 바늘을 잃어버린 것 같아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바늘 때문에 금택은 깊이 잠들지 못했다.
바늘을 손에 꼭 잡고 있는 동안에도 금택은 바늘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서쪽 방에서처럼 바늘이 어느 순간 손에서 날아날 것 같았다. 심지어 금택은 이미 바늘을 잃어버린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한 착각은 불현듯 엄습했고, 금택은 그때마다 손에 바늘을 들고 있으면서 바늘을 찾았다.
--- p.71
주야장천 땀구멍 같은 바늘땀만 반복해서 떠 넣는 것 같지만, 한 벌의 누비옷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쳤다. 대구까지 나가 옷감을 떼어오고, 그 옷감에 감이나 쪽이나 오배자 같은 물을 들이고, 다듬이질을 하고, 올을 튕겨 누빌 선을 표시하고, 치수를 재 도안을 뜨고, 마름질을 하고, 실에 초를 입히고, 앞뒤를 맞춘 천과 천 사이에 목화솜이나 누에고치나 종이 같은 충전재를 넣고…… 누비질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는 듬성듬성 바늘땀을 떠 충전재가 안에서 뭉치거나 밀리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어머니는 그것을 시침질이라고 했는데, 옷이 완성되면 전부 풀어버렸다.
--- p.140
“죽은 사람 옷을 왜 만들어?”
화순이 물었다.
“입히려고.”
“죽은 사람한테 옷은 왜 입혀? 죽으면 아무것도 모를 텐데.”
“깨끗하게 입혀서 보내려고……”
마을 뒷산에 널린 무덤들이 떠올라 금택은 말끝을 흐렸다.
[……]
그러니까 어머니는 갓 태어난 아기 옷도, 산 사람 옷도, 죽은 사람 옷도 만들 줄 알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더구나 바늘 하나로 그 모든 옷을 만들었다. 바늘이 탄생과 죽음을 아우르는 기이하고 오묘한 물건이라는 생각에 금택은 소름이 끼쳤다.
--- p.151~152
“우리 할머니 밑으로 친손녀, 외손녀 다 합쳐 손녀가 아홉이나 되었지. 아홉 중 셋째인 내가 유일하게 할머니 바느질 솜씨를 물려받았다고들 했지. 우리 할머니가 홑청을 꿰맨 이불은 매듭 하나 없었단다. 매듭을 일일이 풀어서는 연결을 했지. 매듭짓는 걸 그렇게나 싫어하셨어. 오이씨만 한 매듭을 풀어서 새 실하고 연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저절로 나왔단다. 고생을 하도 해서 생강 같아진 손이 마술을 부리는 것 같았지. 마술이 뭐 별거겠니? 그런 게 진짜 마술이지. 생각을 해보렴. 오이씨가 얼마나 작니? 그 작은 매듭을 손가락으로 풀어 헤친다고 생각해봐…… 재주도 보통 재주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지.”
--- p.183
어머니의 중요한 단골이 된 옥 사모님이 다녀간 날, 금택은 어머니의 눈속눈금자가 성미와 평상시 습관, 버릇, 기질, 자세 역시 재고 가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미에도, 습관과 버릇과 기질과 자세에도 치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속눈금자로만 잴 수 있는 치수가.
--- p.217
유행하는 옷이라는 것만으로 그녀는 원피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행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는데, 그 이유가 화순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았다.
경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금택은 원피스를 꺼내 살펴보았다. 옷감을 살피던 그녀는 자신도 의식 못하는 새 바늘땀을 살피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옆에 앉은 동료가 물었다.
“바느질이 허술한 것 같아.”
“평생 입을 것도 아닌데 뭘.”
동료가 웃었지만 금택은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원피스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휘발유 냄새가 나.”
“새 옷 냄새야.”
동료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들에서는 말린 고사리나 취나물 냄새가 났다.
--- p.322
“……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가마솥에 데운 물로 손을 깨끗이 씻으셨지. 한 번 씻고 마는 게 아니라 세 번, 네 번 씻으셨으니까. 염을 하는 동안 당신의 손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은 죽음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손이 닳도록 씻으셨어. 아무도 안 만지려는 시신을 만지는 손이었지만, 우리 아버지 손보다 우아하고 정결한 손을 여태 못 봤어.”
[……]
“맞다. 염장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 같지만, 그것보다 확실하게 덕을 쌓는 일도 없다. 죽은 사람이 제 몸을 씻겨주니 고마워 저승 가는 길에 덕을 빌어줄 테고, 자손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죽은 제 부모의 몸을 씻기니 고마워 덕을 빌어줄 것 아닌가. 십시일반이라고, 집집마다 쌀 한 줌씩만 모아도 금방 한 가마니가 되지 않나? 평생을 염장이로 살았다고 하니, 염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염 한 번 할 때마다 죽은 사람하고 그 자손들이 염장이 아비를 위해 빌어주었을 복이 모이고 모여 고스란히 정인한복 여자에게 갔을 테니 그 복이 얼마나 크겠나?”
“조상은 죽어 흙으로 없어져도, 조상이 살아생전에 쌓은 덕은 안 없어진다. 자손들 중 하나는 반드시 그 덕을 보게 되어 있다.”
--- p.331~33
어머니는 여전히 0.3에서 0.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바늘땀을 반복해서 떠 넣어 옷을 지었다. 바늘땀의 길이와 간격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20년을 넘게 누비옷을 지었지만, 누비저고리를 한 벌 짓는 데 드는 시간은 거의 동일했다. 바늘땀을 떠 넣는 데 드는 시간은, 그리고 한 벌의 누비옷을 짓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단축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은 정해져 있었고, 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최근에 지은 누비저고리는 10년 전, 20년 전 지은 누비저고리와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두 달에 한 번 버스를 타고 대구까지 나가 옷감을 떼왔고, 자연에서 구한 재료로 손수 염색을 했다. 염색을 할 때는 우물물을 쓰는 원칙을 고수했다.
--- p.340
오전 내내 누비대 앞에 꿈쩍 않고 앉아 바늘땀을 뜨고 난 어머니의 눈은 멀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바늘땀을 뜨고 나면 어머니의 눈은 어둠과 빛을 구분하지 못할 할 만큼 멀어 있었다. 멀어버린 눈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다시 바늘땀을 떴다. 금택은 문득 어머니의 멀어버린 눈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 p.420
그녀의 바늘에 대한 집착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위험한 수준이라는 것을 깨닫고 금택은 놀랐다.
어머니는 바느질하는 여자로 살기 위해 자신이 포기해야 했던 것
들에 대해 딸들에게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금택은 어머니가 바늘을 통해 얻은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어머니는 바늘을 통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많은 것들을 얻었다. 쌀을, 소금을, 깨를, 밀가루를, 석유를…… 그것은 부령할매도, 한복 거리의 바느질하는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바늘로 먹을 것을 구하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재숙이 바늘로 얻으려 하는 것은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 p.423~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