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 없던 낯선 12월의 첫날, 저를 지도하기로 한 박사님은 각오 단단히 하라며 잔뜩 겁을 주었지요. 달랑 6개월짜리 비자를 손에 쥔 저에게 그는, 반년 뒤 연구 실적이 좋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날이 바로 선생님의 시를 처음 만나게 된 날이었습니다. …(중략) 이른 저녁 아니, 밤에 홀로 아파트의 식탁에서 처음 펼쳐본 선생님의 시집은 그날 밤부터 저에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이국의 거리,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 실험실, 심지어는 집 아닌 집에서의 텅 빈 시간을 밝혀주던 불빛이었습니다. --- p.14, 「Letter 01, from Lausanne, 조윤석」 중에서
윤석 군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의 의과 대학생 시절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본과 일학년, 어둡고 냄새가 심하던 그 교실에서 매일매일 시체 해부를 하면서 드디어 시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를 위로하고 싶어서 시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내 시는 처음부터 수사학과는 별 관계가 없었지만 그 어느 때에도 진심이 아닌 적만은 없었습니다. 진심 아닌 것이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 p.83, 「Letter 17, from Florida, 마종기」 중에서
윤석 군이 귀국을 하면 그간에 공부한 과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하지 말고 그 전문직을 버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과학과 예술의 두 가지 길을 병행시키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는 하지만 한 평생을 걸어 볼 만한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묘한 보완 작용을 할 것입니다. 내가 만일 의사가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시인의 길을 오래 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중략) 윤석 군이 혹 힘들다고 소리를 가끔 지를 수는 있어도 두 가지 전공을 함께 이어가면 생의 끝에 절대로 후회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나에게는 있습니다. --- p.169, 「Letter 36, from Florida, 마종기」 중에서
일전 편지에 과학과 음악을 함께 짊어지고 가보라고 한 것은 엔지니어링이 순수 과학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행복지수에 기여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시를 쓰지 못해 깊은 고민이나 절망에 빠질 때 그래서 우울증 증세가 보이려 할 때 나를 그 수렁에서 구해준 것은 의학 아니, 의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술자의 기술이지요. 죽어가는 사람이 내 도움으로 살아나고 고맙다며 눈물을 흘릴 때, 고통 받는 이를 고통에서 구해주었을 때 내 우울증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고 살맛이 났지요. …(중략) 윤석 군의 연구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막연하기만 한 행복지수의 의미가 넘치고도 남을 것 같네요. --- p.186,「Letter 40, from Florida, 마종기」 중에서
선생님의 말씀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것이 제 음악과 노래의 힘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마음속으로 누군가 내가 사는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저는 ‘knowing'이라고 대답하리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어요. 알아가는 것, 깨달아가는 것, 무언가 수동적으로 배운다기보다는 자극에 반응하는 내 내부의 앎, 이것이 저를 밀어가는 힘이자 목표라고 여겼어요.
--- p.220, 「Letter 48, from Seoul, 조윤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