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이 모든 언급은 기이하고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랑은 인간이 줄 수 있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 가장 고귀한 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멍청하게 만들고 잠재적으로 야만적으로 만드는 감정을 가장 커다란 행복으로 느끼고 또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사랑이란 결국 일종의 병이 아닌가? 그것도 가장 아름다운 병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끔찍한 병.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사랑은 독이 아닐까? 양이 얼마냐에 따라 가장 큰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하는 그런 독 말이다. 도와주소서, 소크라테스여, 도와주소서!
--- p.39~40
사랑과 죽음의 이런 불행한 결합은 ─ 필리프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에도 쓰여 있듯이 ─ 이미 16세기 초, 처음으로 조형 예술에서 중세의 어둡고 순결한 죽음의 무도(舞蹈)를 충만한 에로틱의 무도로 변화시켰을 때에 시작되었다. 그 후 그러한 현상은 죽음에 대한 애호로 나타났고 ─ 아직 사드가 나타나기 이전인데 ─ 문학에서는 사디즘적인 특징으로 이어진다. 비참하게도 성기능을 상실한 사람의 발기에 대한 신화가 생겨난다. 프랑스어 〈작은 죽음petite mort〉이라는 말은 오르가슴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근본적으로는 이율배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말은 처음 들을 때 독창적이고 달콤하게 들린다. 하지만 두 번째 들으면 정말로 기분이 불쾌해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고 성숙할 대로 성숙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죽음에 대한 사랑, 에로틱함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사(情死)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 p.47~50
이렇게 늘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고, 결코 에로스의 도취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매우 냉정하고 근접하기 어렵고 비인간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실은 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을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그 점에서 우리와 아주 가깝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금세 변덕을 부리고, 맹목적인 용기는 없으나 어느 정도 문명화되어 있고, 빈틈없고 현명하나 완전히 치밀하지는 못하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와 닮았다. 또한 오르페우스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아니, 바로 그 좌절 때문에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더 완전한 인간이었다.
--- 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