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사내의 오른손에 쥐어진 휴대폰이 진동을 시작했다. 여보세요. 짧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희생 인간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쪽에서 전화를 걸어도 될까요. 누구 전화일까. 이 자식은 누군지도 모르는 타인에게는 턱도 없이 정중한 말을 사용하고, 바로 곁의 친근한 인간에게는 폭력을 휘두른다. 여태까지 줄곧 그랬다. 그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희생 인간으로 자란 것이다. 이놈이 희생 인간이다. 신관은 희생 인간의 심장을 나뭇가지에 꽂아 태양에 바친다. 나는 신관일까 하고 우에하라는 생각해 보았다.
--- p.136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쓰면서,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그런 것을 생각해 보기는 처음이다. 현대 사회는 희망을 필요로 하고 있다. 희망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다. 즉 현재보다 미래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나 확신이 희망이므로, 난민 캠프에 사는 사람들이나 억압받는 피지배 게급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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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말에 따르면, 몸의 이상은 외계에 대한 반응의 일종이었다. 두통이나 토악질이나 귀울음도 몸이 외계에 반응한 결과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심하게 추워하거나 더워하고,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입하거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스트레스를 느끼거나 하는 것도, 몸이 외계에 반응하여 하나의 신호를 보낸 결과라는 것이었다.
--- p.274
우에하라는 편두통을 견디면서, 사카가미 요시코의 홈페이지 메시지 보드에 자신의 글이 올랐는지 확인해 보았다. 이 얼마나 멋진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냐고, 우에하라는 감탄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고, 상대의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등교 거부의 직접적인 원인이 담임 선생의 머릿기름 냄새였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어느 회사 제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썩은 오렌지가 가득 쌓인 창고 같은 냄새였는데, 혹시 이런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선생은 제멋대로 우에하라 곁으로 다가와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아침, 침대 속에서 눈을 뜨면서 오늘도 그 냄새를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온몸이 쑤시고 아파 왔다. 물론 인터넷의 메시지 보드에는 냄새도 없고, 기계가 찍어 내는 문자이므로 글씨도 누구나 똑같고, 상대의 목소리는 듣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필요도 없다. 자신이 어디 사는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 그리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 p.12-13
붕대나 거즈를 찢으면 달랑달랑 매달리는 늘어진 실처럼 가늘고 손가락 관절 뒤에 생기는 가느다란 주름 간은 것이 보였습니다.....
--- p.252
또는 사회적인 희망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끝났을지도 모른다. 사회가 마련해야 할 것은 틀에 박힌 희망이 아니라, 다양한 세이프티 넷이 아닐까 싶다. 이미 희망은 사회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진실은 교묘하게 은폐되고 있다. 즉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낡아빠진 희망이나 거짓 사회적 희망이 넘쳐나고 있다.
--- pp.285-286, 저자후기 중에서
넷에서는 누구도 정상적인 대응을 모릅니다. 우에하라라는 남자는 살인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런 일을 넷에서 밝히는 사람은 아주 흔합니다. 방금 살인을 하고 왔다는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고, 요컨대 뭐든 말할 수 있는 곳입니다. 나는 웹 캐스터라는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정부가 행하는 고용 계획의 일환으로서 근처 중학교에서 컴퓨터 조작과 홈페이지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평판도 그런대로 괜찮은 편입니다. 넷에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거나 좋을 대로 말해도 된다고, 선생이나 학생이나 학부모 모두가 들떠 있는데, 참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시키무라도 시게하라도 넷만 없었더라면 그런 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의식의 증식에 대해 넷의 커뮤니케이션이 견뎌 낼 수 없으므로, 조그만 질병의 원인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병에 걸리고 맙니다.
--- p.265
너는 쓰레기다. 알겠어? 쓰레기 이하다. 나무를 사랑한다면서, 작은 공원에 심어진 나무만 생각하면 다냐. 그런 인간을 쓰레기라 하는 거야. 전세계에 얼마나 많은 나무가 재목용으로 벌목되고, 산림 자원이 훼손되는지 알기나 해? 전세계의 산림 자원 파괴 현황을 조사해 보기라도 했어? 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일본 기업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산림을 훼손하고 나무를 베는지 알기라도 하느냔 말이야. 그들과 싸울 의지도 없이. 그 공원의 나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냐.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해. 이 쓰레기 같은 놈아.
--- p.166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화살표를 따라 움직이고,타인과 스쳐 지나간다. 화살표에서 벗어나는것은 하나의 공포다. 그런 사람에게는 벌이 주어진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서 벗어나는 인간은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