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통의 고무 패킹이 헐거워져 밥할 때마다 물이 질질 새도, 김치냉장고는 한국인에게 필수품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 ‘곧 시집갈 텐데 혼수로 장만하지 뭐’라고 몇 년째 말해오곤 했는데.
작년 강추위에 실내외 온도 차로 베란다 창에 생긴 금이 여름에 잠깐 멈췄다가 다시 겨울이 되자 두 갈래로 쩍쩍 갈라지며 제 갈 길 찾아가기 시작했다. 올 겨울도 혹한이라던데, 베란다 창은 그 놈의 ‘시집갈 때’까지 못 버티겠지?
---20쪽, 〈혼수로 가져가려고 했지〉

혼자 사는 공간만큼 ‘나’를 잘 알 수 있는 것이 있을까. (…) 내가 움직이고 손을 댄 모든 행위에 따라 공간이 달라진다. 내가 초대한 공기, 내가 만든 구석 먼지, 내가 바꾼 베란다 풍경 등 모든 것에 ‘내 것’이 붙는다. (…) 잡지에서 보던 ‘화려한 싱글 라이프’와는 거리가 먼 현실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지낼 때는 몰랐던 나의 또 다른 면을 알아 가는 재미, 나를 나타내는 단서를 흘리는 재미는 그 무엇보다 크다.
---60~61쪽, 〈단서들〉

결혼 적령기는 대체 누가 정한 걸까.
어릴 땐 분명 나를 가꾸고 채우면 내 가치가 높아진다고 배웠는데, 어른이 되고 난 뒤, 나를 채우는 한 해 한 해가 지날수록 다들 내 값어치는 떨어지고 있다고 말하더라.
나는 아직 날고 있다 하고, 누군가는 점점 떨어지는 중이라 하고.
---81쪽, 〈날고 있는 중, 떨어지는 중?〉

체질상 삐쩍 마른 몸이라 감동을 주는 풍만함은 없었어도 툭 튀어나온 엉덩이만큼은 자신 있었는데.
운동을 열심히 하고 나왔는데도 여전히 소멸해 가는 엉덩이를 볼 때마다, 어딘가 있을 미래의 남편은 나의 20대 초반 탱탱한 엉덩이를 모른다는 게 안타까워.
---88쪽, 〈엉덩이의 추억〉

여드름 자국, 칼에 베인 상처, 기미 등 언제부턴가 몸에 상처가 나면 잘 낫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지. 어른이 되면서 감정을 숨기고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온 힘을 쏟느라 몸에 쓸 에너지가 부족하거든.
---138~139쪽, 〈몸에 쓸 에너지가 부족해〉

한여름에는 기껏 시원하게 샤워한 뒤에 욕실에서 옷을 다 챙겨 입고 나오느라 다시 땀 흘리는 것만큼 찝찝한 게 없는 것 같아.
하지만 혼자 사는 집에선 그럴 필요가 없잖아. 혼자 있을 때 홀딱 벗고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신 나는데!
---188쪽, 〈혼자녀의 특권〉

부모님의 간섭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다가도 정작 힘들 때는 엄마 밥이 그립고 엄마 품에서 잠들고 싶을 때가 있다. 몸이 정말 아프다거나 하루가 너무 고됐다거나.
신 나게 놀 때는 고향 생각 한번 안 하다가 힘들 때만 찾는 아직 애 같은 내 모습이 싫어서 엄마 목소리 듣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보면, 어떻게 알고 엄마는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 나를 울리곤 하는 걸까?
---213쪽, 〈텔레파시〉

사람들은 여자를 두 부류로 나누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요즘 연애해? 얼굴이 확 폈는데.”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얼굴이 안 좋아 보이네.”
왜 자꾸 연애할 때와 연애 안 할 때로만 구분 지으려 하는 걸까? 난 누군가와 함께일 때도, 혼자일 때도 언제나 빛나고 있는데.

가끔씩 밤 산책을 나갔다가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은 도시의 수많은 불빛들을 보면, 그 불빛 속에 혼자인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하곤 한다. _프롤로그 중에서<br/><br/><b>우리, 수많은 혼자들을 위로하는 그림 공감 에세이</b><br/><br/>언제부턴가 ‘화려한 싱글’이나 ‘노처녀’, ‘노총각’이라는 말보다 ‘나홀로족’, ‘혼자녀’, ‘혼자남’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다. 1인 가구 450만이라는 숫자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혼자 산다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공부를 위해, 일을 위해 각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여 드는 서울에는 혼자 사는 사람이 더욱 많다. 인구 1만의 빽빽한 도시에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운지도 모른다.<br/>저자인 백두리 작가 역시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자취 12년차다. 혼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위트 있는 글과 그림으로 풀어내며, 공감이 주는 위로를 전한다.<br/><br/><b>서울살이, 그리고 혼자 산다는 것</b><br/><br/>혼자 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다. 혼자 식당에서 밥 먹을 일이 많다는 뜻이고(〈단골의 비애〉, 〈눈치 주지 마〉),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깼을 때 등을 토닥여 줄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혼자녀의 조건 1. 숙면 능력〉). 특히 서울살이라는 말에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이들보다 쪼들릴 수밖에 없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텔레파시〉, 〈열아홉 타임머신〉)도 담겨 있다. <br/>또한 혼자 산다는 것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만의 공간을 내 마음대로 꾸밀 수 있다는 뜻이고(〈오늘도 꿈틀꿈틀 몽글몽글 숨 쉬는 두리의 방〉), 음악을 크게 틀고 미친 듯이 춤추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는 뜻이다(〈댄스타임 롸잇 나우〉). 무엇보다도, 혼자 산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일 때는 몰랐던 또 다른 나를 알아 가는 즐거움이다(〈단서들〉).<br/>그 외에 몇몇 부작용도 있다. 혼자 오래 살다 보면 노래를 들으며 노랫말에 대답을 하기도 하고(〈혼자 사는 여자의 대화법 2〉), 드라마 속 여자들처럼 집에서도 풀메이크업에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지는 못할망정 떡 진 머리와 무릎 나온 추리닝으로 며칠을 보내기도 한다(〈쓰리콤보+옵션〉). 이 책은 이처럼 혼자 사는 여자의 은밀한 사생활을 때로는 감성적으로, 때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풀어 놓는다. <br/><br/><b>서른살이, 그리고 어른으로 산다는 것</b><br/><br/>“서른 속엔 ‘어른’이 들어 있어서 어려운 건가 봐.” _〈ㅅ-어른〉 중에서<br/><br/>혼자 산다는 것이 단지 부모와 떨어져 사는 물리적 독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혼자 살다 보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경제적?정신적으로도 점차 독립하게 된다. 즉, 혼자 산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한 사람의 어른이 돼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서른’ 속에는 ‘어른’이 들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서른이라는 나이 역시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는 시기다. 마음은 아직 어른이라고 느껴지지 않지만, 치열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어른인 척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쓴다. <br/>언제부턴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잘 울지 않고(〈어른의 조건〉), 20대 때와 달리 감정에 덜 휘둘리기도 하지만(〈강철심장〉), 사실 나이가 들어서 마음이 더 단단해졌다기보다는 감정을 숨기는 데 익숙해졌을 뿐이다(〈꼭꼭 숨어라〉). 서른이 되면 결혼이든 성공이든 뭐 하나라도 이뤄 놓아야만 할 것 같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고(〈9와 0 사이〉), 아직 무언가를 준비 중인 서른, 원하는 것을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는 서른도 많건만 오로지 ‘승자’ 아니면 ‘패자’로만 구분하는 세상이 답답하기도 하다(〈위너와 루저만 있는 건 아냐〉). 이 책은 이렇게 어른으로 사느라 ‘수고가 많은’ 이들의 지친 마음을 다독여 준다. <br/><br/><b>마음을 위로하는 그림 작가 백두리의 첫 번째 에세이</b><br/><br/>저자인 백두리는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어른으로 산다는 것》 등 베스트셀러가 된 여러 책들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잘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많은 책들에 그림을 실었지만 특히 심리 치유서가 많아서 ‘위로 전문 그림 작가’로 불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정이현 작가의 짧은 소설들을 묶은 책 《말하자면 좋은 사람》에서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여, 많은 독자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br/>책에 담긴 그림들은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이지만 작가만의 개성과 감수성이 돋보인다. 특히 각 장의 말미에 수록된 별면에서는 지금껏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백두리 작가의 카툰을 만날 수 있다. 혼자 사는 여자의 대화법과 건강법, 반려식물 이야기 등 본문과는 또 다른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하는데, 그동안 다른 책들을 통해 그림을 보아 온 독자라면 이 작가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