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5년 전 판결문 한글화를 반대했던 논리와 똑같은 주장을 상대로 몇 년을 논쟁했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으므로 한자 지식이 낱말 이해에 실마리가 되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중고교에서는 한문 과목을 가르치고 있고, 중고교 시절에 그 정도만 배워도 사회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이를 과장해서 학부모와 학생들의 불안을 조장한대서야 쓰겠는가? 1948년 제정된 〈한글전용에 관한 법률〉을 이어받은 〈국어기본법〉에서는 공문서의 한글전용을 규정하되 신조어나 전문용어처럼 어쩔 수 없는 때에는 제한적으로 한자나 외국 문자의 병기를 허용한다. 이 정도면 문자로 소통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세상을 거꾸로 돌려 국한문혼용을 하자는 자들이 한자 괴담을 퍼뜨리며 초등학생과 어린 유아에게 한자 급수시험을 치라고 부추긴다. 오늘날 우리말과 한글을 둘러싼 언어생활의 혼란은 주로 영어 남용에서 비롯하지만, 그 틈을 한자가 비집고 들어와 어린 학생의 성적을 볼모로 혼란을 더 부채질한다. 나는 이런 시도가 교육에는 아무런 실익이 없고, 그런 주장은 이권과 맞닿아 있으며 그들이 비난하는 한글전용이야말로 인권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 책에는 한자에 대한 그들의 맹신이 왜 일어나는지 2011년부터 내가 한자 문제와 씨름하면서 찾아낸 답을 담았다.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정의를 잘못 이해한 데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한자가 어떤 둔갑술을 부리는지 눈여겨보지 않은 데에서 그들의 착각과 맹신은 시작된다. 나는 그들의 현실적 타협책이 바로 한글 옆에 한자를 쓰는 ‘한자병기’임도 간파했다. 이 국한문혼용론자들의 끈질긴 공세에 넘어가 교육부에서 2014년 9월에 초등교과서 한자병기 방침을 검토하겠노라고 한 게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발단이었다. 문제를 키워준 교육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밝힌다. 비록 교육부에서 우리 국민의 상식 앞에 무릎을 꿇고 한자병기 방침을 거두었으나, 불씨가 남아 있어 이 책의 출판을 미룰 수 없었다. 한자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분들에게도 이 책이 상쾌한 논쟁의 경험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서문」중에서
물론 공부가 인생 전부가 아니고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싶은 학생, 그리고 자기 아이가 공부를 좀 더 잘하길 바라는 부모에게 ‘공부 잘하는 비법’만큼 매력적인 게 달리 있겠는가. 그러니 한자를 많이 알면 공부를 잘한다는 말이 먹힌다. 출처와 근거를 알 수 없는 이런 말, ‘~다더라’로 끝나는 말을 우리는 ‘괴담’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 한자 괴담은 바로 ‘공부 성적’과 이어져 있다. --- p.34
표음문자냐 표의문자냐 하는 구분은 그 문자로 표기한 낱말이 뜻을 가지고 있느냐 소리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구분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런 구분이라면 한자로 글을 적는 중국 사람들은 입으로 내는 ‘말소리’를 무엇으로 적을 것이며, 한글로 사람의 말소리를 적는 한국 사람들은 서로 전하고자 하는 ‘뜻’을 무엇으로 표기할 것인가? 한자나 로마자나 한글 따위 어떤 문자든 그 문자로 적은 글은 소리를 표현함과 동시에 뜻도 담고 있다. 뜻과 소리를 기록하기 위해 문자를 만들었다는 목적에서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자 역시 소리를 표현하고, 한글로 쓴 글자도 뜻을 표현한다. --- p.93
…… 중국에서는 그 한자의 뜻을 일러주는 고정된 어떤 훈이 앞에 붙지 않는데 우리 한자 공부에서는 번역의 과정이므로 한자음과 별개로 뜻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천’이라는 음은 ‘하늘’이라는 뜻을 압축하여 번역하는 역할을 맡는다. 앞서 말했지만, 중국어는 고립어인지라 1음절로 만든 낱말이 많지만, 한국어에는 2음절 이상의 낱말이 많다. 그러니 같은 뜻의 말을 비교하면 중국어가 한국어보다 짧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말 ‘아름답다’는 4음절이지만 중국어에서는 같은 말이 ‘메이’라는 복모음 1음절 낱말이다. 그래서 우리 한자 교육에서 ‘美’는 ‘메이’와 비슷한 ‘미’라는 음을 갖게 되어 ‘아름다울 미’라고 가르친다. 4음절 즉 네 글자짜리 낱말이 1음절 한 글자짜리로 팍 줄어드는 것이니, 이를 ‘압축’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4메가짜리 파일이 1메가짜리 파일로 압축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압축 효과 때문에 한자에는 그 글자 속에 뜻이 살아 숨 쉰다고 착각하기 쉽다. 실상 그 한자의 뜻이란 한자로 번역되기 이전의 우리나라에서 뜻을 약속한 토박이말이 있었기에 그것이 훈으로 붙어 어떤 명시적인 뜻을 담아내는 기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인데 말이다. 번역자가 원작자 흉내를 낸다고나 할까? --- p.97~98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한자의 세 구성 요소는 글자 모양, 음, 뜻(훈)인데, 한자어 낱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요소는 그 낱말을 이루는 한자의 뜻에 관한 지식이라는 점이다. ‘애국’이라는 낱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 음이나 ‘愛國’이라는 글자 모양이 아니라 ‘사랑 + 나라’라는 한자의 뜻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건 내 주장이 아니라 앞서 소개했던 방송토론 상대의 말에서, 그리고 한자 맹신자들의 말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핵심 논리다. 내가 그 짧은 토론에서 바로 이 주장에 밀렸던 것이다. 그들이 한자 공부나 한자 표기를 강조하는 명분은 모두 표의문자인 한자의 ‘뜻 요소’에서 나온다. 한자 모양을 어찌 써야 한다느니 따위를 절대 강조하지 않는다. ....... 그러니 한자를 알아야 한자어 낱말의 뜻을 알 수 있다는 주장의 진정한 의미는 한자의 글자를 알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한자의 음에 가려있는, 즉 압축 번역된 뜻을 알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게 옳다.
--- p.105~107
모두 해당하지는 않지만, 나는 한자가 압축번역 기호이므로 한자어 낱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그 구성 한자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한자의 70%가량은 훈이 토박이말이니 초등학교에서는 특히 토박이말의 느낌을 잘 살려 쓰도록 가르쳐야 한다. 한국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한자어는 단지 어떤 토박이말의 번역 압축어일 뿐이므로 그 뜻을 이루는 우리말의 생생한 의미를 어린 시절부터 섬세하면서도 풍부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중고교 한자 교육을 위해서라도 초등학교에서는 토박이말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 p.122
동형어에 관한 한자 맹신자들의 사고는 우리 주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지극히 현실과 사회성을 빼버린 망상일 뿐이다. 우리는 남 앞에서 그렇게 ‘사기’라는 단 한 마디만 내뱉고 침묵하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면 대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사장님이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모든 직원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어요.”
나는 이 문장을 말로 듣건 글로 읽건 앞의 ‘사기’와 뒤의 ‘사기’를 혼동할 사람은 없다고 100% 확신한다. 이걸 굳이 사기(詐欺), 사기(士氣)라고 한자를 병기해야 구별할 수 있다는 말은 억지 아니면 그야말로 ‘사기’다. 물론 낱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아직 속아서 당했다는 ‘사기’ 말고 다른 ‘사기’를 알지 못한다면 예외로 칠 수 있겠다. --- p.133
한자 급수시험에 응시하는 수험생의 절반 이상이 초등학생이라는 현실은 초등과 유아 쪽에서 더 큰 시장을 만들어보겠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욕구를 현실로 바꾸어낼 장치가 바로 초등교과서 한자병기와 초등 적정 한자 수 제시이다. 적정 한자 수를 정해 놓고 이를 교과서에 병기하는 순간 적정 한자 수는 반드시 익혀야 할 필수한자가 되어 사교육 기초한자 수로 둔갑한다. 그러면 교과서의 한자어 구성 한자를 공부하는 건 바로 한자 급수를 따기 위한 공부와 같아지고 만다. 학습지 업체와 급수시험 업체가 원하는 교육을 전국의 공교육 기관에서 시키는 꼴이다. 이것이 바로 ‘한자 교육 활성화 정책’의 진면목이다. 그러니 그 본질은 ‘국가?사회적 요구’가 아니라 ‘사교육 시장의 요구’다. --- p.219
훈민정음 서문이나 최만리 상소문, 세종실록 등의 글을 통해 우리는 세종께서 온 백성을 소통의 대등한 상대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세종의 민본정신을 요즘 말로 풀어 보라면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인권 의식’이라고 답하고 싶다. 한글은 인권이다.
--- p.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