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블랙국입니다. 도움을 요청합니다.” 블랙국이란 중국에 나와 있는 북한 총정치국 산하 정찰총국을 의미하는 은어였다. 수화기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묵음 상태가 잠시 이어지더니 조금 전과 다른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도움을 요청하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소속을 증명할 증거를 갖고 있습니까?” “영변 약산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류조국이란 사람입니다. 실험실 주변에 만개한 꽃들 중 한 송이를 꺾어 왔습니다.” “지금 약산연구소라고 했습니까?” “그렇소.” 약산연구소는 북한 정찰총국 산하 정보국의 위장 명칭이었다. “곧 모시러 가겠습니다.” ---pp.35~36
“그들이 지금도 전 세계 무기 생산과 판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입니까?” 교수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민우가 되물었다. “군산복합체의 분쟁 배후론에 대해 ‘과거 미.소 냉전시대의 얘기다’, ‘지금시대에 맞지 않는 철지난 음모론이다’라고 가볍게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그들에 활동에 대해 자세히 모르거나 맹목적인 강대국 추종자, 둘 중의 한 부류요. 사실은 냉전 대결 구도의 붕괴 이후에 크고 작은 분쟁은 전세계에서 더 늘어났어요. 뿐만 아니라 군산복합체들의 분쟁 개입도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 무기 판매 방식에서 전쟁의 계획을 짜고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심지어는 용병을 투입해 전쟁을 대행해 주는 데까지로 진화되어 왔어요. 반면에 군산복합체를 향한‘악마의 전쟁 상인’과 같은 비난 여론은 과거에 비해 줄어들었는데 그것은 무기 판매 행위가 줄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주던 방식에서 탈피해 정부와 의회를 앞세운 방식으로 무기영업을 바꿨기 때문이요.” ---pp.169
석관동 A 호텔 12층 비즈니스센터실. 컴퓨터 화면 하단에 메신저 호출을 알리는 노란색 신호가 깜빡였다. 사내가 마우스를 이용해 메신저를 끌어왔다. “파트너, 사업이 지금까지는 비교적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소.” 키보드 위에서 사내의 빠른 손놀림이 이어졌다.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니 다행이오.” “파트너! 어둠 속에 있어야 할 블랙이 밖으로 나왔소.” “…….” “회색눈의 옆모습이 방송에 노출됐단 말이오. 이것은 전략의 큰 노출이요.” 상대의 메시지 톤이 갑자기 무겁게 내려 않았다. “그 정도로는 아무도 그를 찾을 수 없을 거요.” “그건 당신 오만일 수 있소. 작은 구멍으로 댐이 무너지는 법이오.” “회색눈은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자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화근을 정리하시오.” “이미 한국인 2명이 죽었소. 장진동도 투신했고 이 교수도 사망했소. 한국 정보기관은 바보가 아니오.” “당신이 해를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들이 우리 계좌의 목 근처까지 도달했었소.” “대처가 지나치면 그들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요. 시간을 좀 주시오.” “당신이 안 하면 전문가들이 나설 거요.” “여긴 방콕이 아니오. 치안이 허술하지 않단 말이오.” “파트너, 우린 당신에게 많은 돈을 투자했소. 당신이 평생 쓰고도 남을 해외비자금, 당신 가족이 누리고 있는 모든 풍요로움, 그리고 당신이 곧 오를 고위직 자리,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의 로비와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메신저가 일방적으로 끝났다. “새끼들.” 그가 거친 욕을 내뱉었다. ---pp.266~267
“저희 원에선 두 분의 안위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 왔습니다.” “원이라고요? 그렇다면 국정원?”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국정원에서 저희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얘깁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감시가 아니라 보호 목적이었습니다.” 그때 민우의 동공에 그의 얼굴이 점점 강하게 박혀오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한세윤의 얼굴 너머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이 가물거렸다. 한세윤이 민우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민우의 얼굴을 정면 응시했다. “아니, 당신은?” 태국 남부에서의 위험천만했던 순간들이 민우의 기억 속에서 오버랩됐다. 한세윤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기억나십니까?” 그는 바로 언덕 마을의 한 옥상으로 쫓겨간 민우가 괴한의 권총 위협을 받던 순간 나타나 민우를 구해주었던 바로 그 자였다. “방콕 뉴스에 한민우 씨가 방콕 폭탄테러 현장에서 USB를 입수하는 장면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저희도 곧바로 USB 회수에 나섰습니다. 물론 민우 씨를 보호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민우 씨는 여러 차례 위험을 잘 극복하고 무사히 한국까지 돌아왔군요.” ---pp.378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초등학교도 나왔습니다. 한국은 내 어머니이고 조국입니다. 그러한 한국이 미국등 강대국들의 100년 게임에 희생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100년 게임이요?” “한국이 지금처럼 국방 정책을 편다면 앞으로도 30년은 더 미국 무기업체들의 돈 주머니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70년간 무기 소비 시장 역할을 한 것에 더해서요.” 연구원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북아시아 무기 시장 활성화 방안이란 것이 어떤 겁니까?” 한세윤 요원의 질문에 연구원은 흔들림 없이 답변을 이어갔고, 민우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신경을 곤두세우고 들었다. “예를 들면 사드 해외 배치도 바로 WOUP에서 나온 겁니다. 사드의 한반도 배치는 표면적으로는 주한 미군의 요청이지만 실제로는 이곳에서 작업한 것입니다.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될 경우 동북아시아에서 WOUP 회원사들의 재래식 무기 판매량이 10년에 걸쳐 30%p 가량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근거가 뭡니까?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보시지요.” 민우와 한세윤 요원은 설명하는 헨리슨 박을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주한 미군에 사드가 배치될 경우 한국의 안보 상황은 북한과의 1대 1 대치 상황에서 중국까지 포함한 다자적 군사 대치 상황으로 변하게 됩니다. 따라서 다자적 군사대치 상황이 될 경우 한국은 북한은 물론 중국의 재래식 공격에도 대비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하기 때문에 무기 구입 예산이 대폭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