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H. Huxley, 1825~1895 잉글랜드의 일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역 사립학교의 교사였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여덟 형제자매 중 막내였던 헉슬리는 초등교육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그래도 런던에서 결혼해 살고 있던 누나의 집에서 생활하며 왕성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과학은 물론 고전문학, 철학, 외국어 등을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가며 공부했다. 1845년 채링 크로스 병원 의학교에서 학위 과정을 마친 뒤 1846년 왕립 외과의 대학의 시험을 통과하고, 곧이어 남양 지역을 탐사하는 영국 군함 래틀스네이크호에 보조 외과의 자격으로 승선해 4년간 근무했다. 그동안 호주를 비롯한 남양 지역 해양 동물의 형태학, 비교해부학, 고생물학적 연구 결과들을 정리해 런던으로 보냈고, 그중 일부는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학계에 발표되기도 했다. 귀국 후 과학인이 되기로 결심한 헉슬리는 1854년, 당시 새로 설립된 국립광산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헉슬리는 평생 영국 사회 내에서 과학 분야가 문화적 권위를 지니는 중요한 활동임을 강조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도시 빈곤층이나 노동자의 임금 문제와 같은 영국 제국 내부의 정치적·사회적 갈등, 그리고 외국과의 무역이나 식민지 문제에 대한 갖가지 사색에 잠겼다. ≪진화와 윤리≫는 그 와중에 행해진 강연이다. 이 글이 그의 총서 마지막 권을 장식하며 출판된 다음 해인 1895년 6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역자 : 김기윤
1952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과학교육학과(생물 전공)를 졸업하고, 미국 오클라호마대학교에서 18세기 자연사 연구로 과학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폴 화이트의 ≪토머스 헉슬리: 과학 지식인의 탄생≫을 번역했으며, <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시대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정의라는 개념은 행위에 따른 상벌로부터 점차 정교해지면서 공과에 대한 상벌, 또는 다시 표현하자면 동기를 감안한 상벌로 변화해 갔습니다. 이제 정당한 행위란 단순히 정의의 동의어가 아니라 올바른 동기의 결과를 뜻하며, 도덕적 결백의 적극적인 구성 요소이며 선함의 본질로 간주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p.77
사회의 윤리적 진보는 우주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주 과정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윤리적 진보란 우주 과정과 싸우면서 얻어 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