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번만큼은 실패하지 않도록! 내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흥신소에 들통 나지 않도록! 느닷없이 여기서 누군가가 ‘이 여자는 결혼 사기꾼입니다’라고 떠벌리지 않도록……!’ “이 여자, 결혼 사기꾼이라오!” ‘그래, 그렇지! 그런 소리를 떠벌리는 녀석이 없도록! 그런 말이 나왔다가는 난 이제 끝장이니까…….’ ‘아니?’ 이즈미는 자신의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심조심 목소리가 들려온 뒤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이즈미나 그녀의 약혼자보다 훨씬 멋진 알로하셔츠를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반바지에 샌들 차림으로, 수염을 기른 초로의 남자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 p.14~15 <밀짚모자를 쓴 남자> 중에서
“우리 아버지는 보시는 대로야. 여기 적혀 있는 것은 이제까지 다녀간 도우미의 이름이고, 그 옆의 숫자는 며칠 만에 그만두었나 하는 결과지.” ‘아버지와 아들? 리스트?’ 이즈미는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사내와 리스트를 몇 차례나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조 이치로라고 불린 노인이 테이블의 볼펜을 이즈미의 발 아래로 던져주었다. “이름을 스물두 번째에다 적어 둬! 일하기 싫으면 ‘0일’이라고 써도 상관없어. 최단기록이지!”
--- p.49 <조 이치로 씨의 저택> 중에서
“수호의 몸은 상처와 멍투성이였습니다. 할머니가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해주었습니다. 그 덕택으로 며칠이 지나자 상처가 간신히 아물었습니다. 그래도 하얀 말을 빼앗긴 슬픔은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호는 하얀 말이 어떻게 지낼까 하고 시름에 잠겨 있었습니다. 하얀 말은 과연 어찌 되었을까요?” “어떻게 된 거야?” 조 이치로가 몸을 앞으로 쑥 내밀면서 책과 이즈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라고 하면 화를 낼 거죠?” 이즈미가 짓궂게 묻자 조 이치로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뒤, 평소처럼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어른을 놀리면 못 써! 어서 계속 읽기나 해!” 사실 조 이치로는 이즈미가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 순간 몹시 놀랐다. 말 많고 시건방진 이즈미가 낭독하는 목소리가, 첫 마디부터 조 이치로의 가슴을 물들이듯이 대번에 파고들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아니, 이 아이가?’ 하고 반신반의했지만, 이즈미가 읽어나갈수록 조 이치로는 자신이 가졌던 편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즈미에게는 분명히 낭독의 재능이 있었다.
--- p.96~98 <수호의 하얀 말> 중에서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쉬 사라져버린다는 뜻을 그 아름다운 색깔에 담아 우쓰시 빛깔, 그러니까 물빛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렇게 불렀어.” 이즈미는 잠자코 조 이치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푸른 풀로 눈길을 돌렸다. 이즈미는 지금 조 이치로가 하는 말을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기억의 실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노초, 사라져버리는 색깔…….’ (중략) 그때 이즈미는 방금 조 이치로가 들려준 노초의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뚜렷이 기억해 냈다. 당연히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었다.
문득 뒤돌아보니 덧없는 푸른 꽃은, 자신의 색깔이 이내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아는지 모르는지 초여름의 햇살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p.115~116 <푸른 물빛 꽃> 중에서
길 양쪽에는 벚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었다. 벚꽃이 흩날리면서 바람에 실려 그 일대를 뒤덮었다. 그리고 떨어져 내리는 꽃잎 너머, 언덕길 근처에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빠!” (중략) 그날과 똑같이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거기에 서 있었다. “난 절대로 아빠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엄마와 나를 이토록 괴롭힌 아빠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너무나 한스러워서 엄마에게 야단맞을 소리도 수없이 외쳤어. 멍청이라느니, 얼간이 같다느니, 죽어버리라고도……. 난 연도 제대로 잘 날리고 싶었어. 하얀 연. 아빠랑 같이, 그 강변에서 다시 연을 띄우고 싶었단 말이야.” 이즈미는 금방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용서할 수 없지만, 아빠가 미운 건 아니야. 아빠가 우리를 버리지는 않았어. 엄마와 나는, 우리보다 훨씬 외로운 사람에게 아빠를 빌려주었을 뿐이야. 바로 그 천사 모습의 사람, 날개는 빛났지만 그림자가 몹시 옅었던 거 난 알고 있어. 아빠가 없어지면 지워지고 말리라는 걸 분명히 알았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엄마가 불쌍하단 말이야!” 아버지의 입가에 ‘미안해’ 하는 속삭임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 p.152~154 <어긋난 시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