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전 환경부장관이다. 조선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제11회 행정고시에 합격, 내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청와대 공직기강 비서관, 여천시장, 목포시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로하스코리아포럼 이사장, 환경문학회 대표 등 계속 환경 분야 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2003년 계간 《포스트모던》을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다.
편자 : 김종천
군산사범학교 졸업, 서라벌예대 문창과 수학. 오랫동안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92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사촌 형님』『소리치지 않는 나무』가 있다. 현재 서울시인학교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계간 《포스트모던》 주간의 시인이다.
내게 ‘어머니’라는 말의 뜻을 묻는다면 나는 “모국어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말 국어사전에 들어있는 몇 십만의 낱말, 아니 거기 실리지 않은 몇 백만의 낱말들을 하나로 묶는다면 ‘어머니’ 세 글자가 될 것이다. “네 입에 밥 들어가니 참 좋다. 난 안 먹어도 배부르다. 하지만, 남의 입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때는 동기간들을 생각하라는 말씀으로만 들었다. 지금은 이웃을 보살피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새긴다. 아내와 다투고 돌아누워 자는 밤 어머니가 오셨다. “오해는 바로바로 풀거라 절대 가슴에 묻어두지 말아라“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말씀하셨다. 이 짧은 이승의 시간을 꽃처럼 살되, 꽃과 잎이 떨어져도 허전하지 않는 내일을 살거라. 세상의 일을 기쁘고 즐겁게, 때로는 아프고 슬프게 맞이하면서 내 딸도 어른이 되겠지. 네가 겪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니 마주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거라. 차디찬 어머니의 얼굴에 내 얼굴을 부비며 울부짖었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 제 어머니를 잘 아시겠지요? 이제 당신 곁으로 갑니다.” 내가 더 이상의 부탁을 하지 않아도 어머니가 어디로 가실는지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많이 의지하신 탓에 오히려 모녀간에 살뜰한 정이 붙어 더욱 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시인이 된 딸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시고 내 손을 꼬옥 잡아주시던 어머니, 이제는 그 손을 잡을 수 없으니 마음이 아프다.
1967년 6월 20일, 시계가 정확히 정오를 짚을 때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고 그 후 내 목숨 속에서 나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계신다. 내 삶의 모든 연소(燃燒)와 봉헌(奉獻)들은 내 어머니와 나와의 두 사람 몫인 것을 나의 하나님만은 알고 계신다. 그러니 내 딸이면 어떨까. 엄마. 싫다고? 그래도 엄마, 내 딸로 태어나 나에게 대들기도 하고, 내 약점도 꼬집고, 떼도 부리고, 그래서 엄마도 듬뿍 사랑받는 여자로 한번 살아봐야 하잖아요. 엄마! 다음 세상엔 꼭 내 딸로 태어나, 엄마! 도대체 자식의 성공이, 바쁜 생활이 어머님께는 무슨 도움과 의미가 되는가를. 이제야 알겠다. 왜 그 많은 유행가와 사모곡이 불효에 우는가를. 비가 오고 있다. 평생을 눈물에 젖으셨던 우리 어머님이 이 비에 젖으셔도 나는 이렇게 속수무책일 뿐이다. 어머니는 매사에 그런 식으로 자식을 키웠다. 체험해봐야 스스로 깨닫게 된다고 하셨다. 성격이 분명해서 예스, 아니면 노였다. 한 번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였다. 대신 약속하면 꼭 해주셨다. 일단 선택을 하게 하고 선택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