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지어진 문어 타워(미국 잡지 《롤링 스톤》의 취재 이후 회사에 붙여진 별명)는 압도적인 유리와 강철로 된 건물이었다. 파리가 낙상할 것 같은 외관은 빗물도, 비난과 소송도 모조리 흘러내릴 것처럼 매끈했다. 21억 달러의 이 빌딩이 지상에 출현하기까지 꼬박 4년의 공사 기간이 걸렸다. 뉴욕 지자체는 2001년 9?11테러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이 지역을 되살리기 위해 세금 혜택과 자금 지원을 늘렸다. 합리화의 대가들인 폴만팍스의 세법 전문가들은 맘껏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새로 단장한 글로벌 금융구역에 뉴욕커 납세자들이 3분의 2의 재정지원을 한 때문이었다. 뉴욕 시장은 ‘월드트레이드 센터의 미래를 믿는다.’는 폴만팍스 회사의 시민의식을 치하하며 몸소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 p.14~15
세바스티앙은 승강기 안에서 통계표와 핵심 정보들이 간추려진 내용을 훑어보았다. 유로존 회원국들, 국채, 통화 스와프의 거래 총액 등이 담겨 있었다. 그는 문건을 두 번이나 읽었다. 2001년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할 당시 그리스의 국채를 은폐하기 위해 폴만팍스 회사가 써먹은 기법이었다. 상세 도표에는 각 나라들에 저당 잡힌 재화들(공항, 고속도로, 공기업들), 미래 수익률 평가, 만기일이 적혀 있었다. 층수가 내려갈수록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세바스티앙은 이해가 상충되는 비난들에 어떻게 대응할지, 금융 트레이더가 투기에 적합지 않은 상품을 고객들에게 매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정당화시키는지를 알고 있었다.
“저흰 고객을 상대로 도박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효율적인 위기관리를 중시하니까요.”
--- p.23~24
세바스티앙은 아침마다 스마트폰을 끼고 지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버튼을 눌러대며 사람들을 차례로 협박했고, 컴퓨터에 달라붙어 금융 정보들로 나온 통계수치와 그래프들과 대담을 보며 잔재주를 부려야 했다. 삶의 질이 올라간 시대를 사는 금융 고위 간부의 우스운 캐리커처였다.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 안에서 탁하고 찬공기를 쐬어서인지 얼굴에 붓기가 남아 있었다. 상류층이라는 낙인은 찍혔지만, 여전히 소년 같은 앳된 용모가 남아 있었다. 세바스티앙은 붓고 칙칙해진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24시간을 풀가동하여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과 내부의 정보유출, 위반 내용, 공모, 부도덕성에 대한 소문들을 잠재워야 했다. 유네스코 위원회 홀에서 노랗게 뜬 얼굴로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서 있는 그는 속세와 담을 싼 병약하고 우울한 금욕주의자 같았다.
--- p.96
“세바스티앙, 아무도 너한테 폴만팍스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라고 강요한 사람은 없어.”
“이젠 그 게임에서 나올 거야. 내뺄 거라고!”
자리에서 일어선 세바스티앙은 베르트랑 쪽으로 걸어가며 버럭 화를 냈다.
“이건 집단으로 조작한 일이고 정신 나간 짓이었다고. 우리가 금융계 친위대들이라면, 너와 바네사는 그 협력자들이란 말이지!”
베르트랑의 눈길은 세바스티앙 등 뒤로 벽 쪽에 드리워진 프랑스와 유럽 국기들에 쏠렸다. 그는 세바스티앙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를 내쫓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부탁이다. 그만 가줘. 영웅주의, 그건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그런다고 최후에 너한테 메달을 걸어줄 사람도 없단 말이야. 네 목숨이나 보전하고 아이들 생각해. 언젠가 지나게 될 고약한 시기일 뿐이라고.”
세바스티앙이 문을 밀어젖히며 경고했다.
“지옥에서 보자. 테오한테는 다행이야. 걔 엄마가 너보단 훨씬 용감하니까.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로 둔갑하지 않도록 조심해!”
--- p.142~143
“진실, 어떤 진실? 누구를 위한 진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주제넘게 굴지 말고 숫자나 위조해. ENA의 공공재정 운영 수업시간에 안 배웠나? 숫자는 조작하라고 있는 거야. 자, 어서 일하러 가!”
베르트랑도 자신의 직급에서 하달되는 명령에 복종한다. 직급이 낮은 자를 때려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다.
“자네 양키들 하는 거 못 봤나? 실업률이 20% 상한선을 넘었을 때, 공식 통계를 내지 않고 오바마 행정부 스태프들이 12.5%로 발표했다고.”
“그랬나요?”
정책관은 갈수록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베르트랑은 그게 무얼 뜻하는 제스처인지 알았다. 예전 자신의 버릇이기도 했다. 젊은 기혼자에게 결혼반지는 끝내 족쇄 같은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바마를 믿었지! 아무도 그 사실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고! 신문기자들까지도. 내가 장담한다고. 얼마나 멋지고 기똥차! 자네 은행가들인 친구 있지? 그자들을 봐, 앞서 가잖아! 은행가들이 하는 짓을 보면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한다고. 속여먹는 데는 왕들이잖아!”
--- p.192~193
2008년 이후 월가의 어떤 증권사 사장도 판결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한번쯤 폴만 회사를 수술해 썩어 문드러진 살점들을 모두 도려내고 세상에 떳떳이 드러내 보일 수 있게 얼개를 맞춰야 했을 것이다. 다음 폭로가 있기 전까지 말이다. 그때 가선 재수술해야만 할 것이다. 세바스티앙은 아마도 그걸 미리 제레미에게 알리려 했던지 모른다. 그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점점 굳어갔을 테니까. 제레미는 내심 그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2008년에 폴만팍스는 뒤로 빠져나갈 구멍들을 마련해 놓았다. 나노 테크놀러지에 투자했고, 아르헨티나에 땅을 사두었으며, 마이애미와 시카고 거리에 경매 붙은 43채의 아파트들을 매입해 두었다. 회사는 그룹 패밀리를 안전하게 피신시키곤, 애초에 그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언지도 점점 갈피를 못 잡아갔다. 그리고 세계화의 역효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불행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0.001%만이 모든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할 수 있지만 부자이건 아니건 간에, 이 지상에서 정말로 플랜 B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 p.225~226
짤막한 영화가 끝나고 기자들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각자 자리에 앉은 그들은 공장처럼 번잡한 타인들의 소음을 몰아내려 헤드폰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컴퓨터 자판에 고개 숙인 채 책상머리에 들러붙어 앉은 기자들은 정보의 OS(운영체제)들이다. 거기 악의 진부함이 있었다. 지금에 와선 문화적 포기라는 진부함이 되었다. 그건 소리 없이 내부적으로 집단이 붕괴하는 것이어서, 진부함 이전에 기자로서의 명예를 떨어뜨리며 반항심의 기반을 흔들어놓는다. 기자들만큼 연루된 것들이 많은 이들도 없다. 사장들이나 정치인들과 뒷거래를 하다 보면, 비평적인 거리감을 잃게 되고, 자신도 그들처럼 세상의 조명을 받고 부자가 되고 싶어진다. 자주 만나면 닮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급여는 턱없이 낮고, 언제 잘릴지 모를 직업은 불안하기만 하다. 권력을 감시하고 그에 항의한다고 간주되는 기자들이건만, 신문사의 옹색한 자리에 매달려 있다 보면 권력에 바짝 붙는 것만이 살길이다. 더욱이 통계라는 이름의 사적 자본주의는 권력을 비방하는 기자들의 숨통을 조인다. 이제 수익성이라는 강압적인 조건에 예속된 이후로, 더 이상 정부 권력에 대항하는 제4의 권력, 언론과 미디어는 존재치 않게 되었다. 권력과 결탁하면, 기자라는 직업은 그 존재하는 이유를 말살하는 것이다. 클라라도 기자 경력을 쌓는 동안 취재한 시간보다 해고의 카트에 실리지 않으려 더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세바스티앙의 말이 맞았다. 저널리즘은 죽은 것이다. 그 역시도 수년간 혜택을 받았지만 저널리즘보다 더 오래 살아남진 못했을 것이다.
--- p.308
앙투안은 은밀히 그들을 관찰해 왔다. 그들은 모든 걸 전복시켜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응주의의 1인자들인 그들은, 재능 때문이 아니라 세심할 정도로 규칙들을 잘 지켜온 탓에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어쩌면 충성심일 수도 있다. 한 번도 반대 입장을 표명한 적 없는 이전 세대 덕에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온 셈이었다. 이전 세대가 신었던 편안한 모카신에 아무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그냥 발을 밀어 넣었으니까. 결코 기대를 저버린 적 없는, 어쩌면 죽여야 했을지 모를 거짓말쟁이들인 아버지 세대 말이다. 그 아버지들 덕분에 씨 없는 밀감을 만들었고, 유전학적으론 변형됐어도 정신적으론 순수를 지키며 별 장애 없는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이다. 교대로 어린이들의 안전을 지키는 해변학교처럼, 이전 세대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들은 사업이건 공무건 권력을 계승한 부패한 엘리트들을 대변한다.
--- p.336~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