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성적, 이성 친구로 고민하는 또래들과 달리 나는 보다 근본적인 고독과 사투를 벌였다. 그로 인해 친구들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행복하고 따뜻했던 가정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이를 대신할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는 그 세계가 될 수 없었다. 대신 영화야말로 내게 새로운 안식처가 되리라는 것만은 더욱 분명해졌다. 영화의 세상 속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한 편의 세계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섰고, 쉼 없이 영화를 봤다. --- p.30
낯선 곳에서의 만남, 새로운 경험들은 나를 자유롭게 했고, 나는 그 시간에 흠뻑 취했다. 어떤 이는 그런 나를 두고 ‘자유인’이라 불렀고, 그것은 마치 나의 새로운 이름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사람들의 눈으로부터 자유롭고, 생각과 관념에서 벗어나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인생을 그려가는 자유인이 되리라고 다짐했다. --- p.41
부득이하게 촬영 스케줄이 잡히지 않는 한, 여름이면 모아 놓은 돈이 얼마든 몽땅 챙겨서 계절이 끝날 때까지 바다와 태양을 즐기러 떠난다. (……) 마음을 나누는 친구의 만류도 뿌리차고 떠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바다다. 바다를 만난 후로 나는 뜨거운 태양 아래 펼쳐지는 여름 바다와 함께 하기 위해 나머지 계절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 p.73
사랑받고 있을 땐 있는지도 몰랐던 부드러운 감각들이 내 안을 박차고 나와 주위 공기까지도 감싸 안는다. 몸은 그것을 기억하고, 한번 기억된 감각들은 내 안의 날카롭고 뾰족한 신경들을 둥글게 다듬는다. 미소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눈빛은 반짝이고, 세상의 가치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것이 내게로 온다. --- p.91
“지금 네 꿈은 뭔데?” “죽는 순간까지 내 안의 나를 다 발견하고 가는 것.” --- p.115
밤이 되면 이야기는 더욱 깊어졌다. 불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차례로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밤이 다하도록, 아침 따위 오지 않기를 바라며. 아니, 오더라도 우리만은 비켜가기를 기독하며. 해가 뜨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겠지. 너는 파리로, 나는 서울로, 미래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잊어버릴 만큼 지나간 시간은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