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舞山’ 자락이, 유용주의 강보였다. 별이 뜨기 시작하면, 이 山의 神들은, (北歐神話의 戰士 Einherjar들이, 전장에서 돌아와, Odin의 홀 Valhalla에 모여, 투구와 갑옷을 벗어 벽에 걸듯) 토끼며 노루, 호랑이며 반달곰, 참나무며 소나무, 재나무며 느릅나무 들이라는 有情의 記號들을 벗어, 神檀樹 가지에 걸어 놓고, 이 나무를 둘러 돌며, 춤 추고 노래하여 잔치하는 것을, 유용주는, 그들 가운데서 보고 듣고 자랐다. 그러는 새 그도, 그들의 춤을 익히고, 그들의 노래를 배웠는데, 그의 韻文的 정신은, 그렇게 살을 입었다. 별이 지기 시작하면, (아인헤르야르들이, 다시 투구와 갑옷을 쓰고 입어, 밤새껏 함께 마시고, 노래하며, 춤과 정으로 어울어졌던 동료들끼리, 적이 되어 서로 해치는 전장에로 출전하듯) 이 神들도, 벗어 뒀던 의상들을 다시 걸쳐 입고 들로 나가는데, 유용주는, 그들의 그 들에서의 고통과 슬픔을 또한 초롱히 지켜 보았으며, 함께 고통하고 슬퍼했더니, 그것의 그의 散文的 정신의 뼈를 만든 것이었다. 神舞山은 그리고, 우리네의 江湖이다. 이 강호를 강보로, 그 귓(것 + 곳)의 悅과 苦의 두 젖퉁이를 빨아, ‘시베리아의 원목’ 같이 자란 그가, 밝히고 들려주는, 저 神들의 얘기는, 우리에게는 갑자기 주어진 복이다. “김호식 씨는(물론 유용주의 익명일 테다.) 시베리아의 원목 같아, 저 거친 가지만 툭툭 잘라내면 거목이 될 것”이라고, 좋은 눈을 가진 누구들이, 술잔을 건네며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유용주는, 그 ‘거친 가지’를, 그 자신의 고통과 고뇌와 고역을 통해, 스스로 잘라낸 것이다. 그리고 그는, 神舞山 기슭의, 全食性 반달곰이 돼버린 것이다. 꽃이며 딸기 따위로 배를 불리는가 하고 건너다 보고 있으면, 연어며 노루 따위의 골통을 쪼개, 그 골도 탐해 먹어 치우고 있다. 言語의 이 반달곰은, 그 산불 같은 정신으로, 韻文/散文 가리지 않고, 막우 쳐눕히고, 막우 처먹어댄다. (반달곰이 있는 고장의) 自然이 갖는, 창조적 역동적 힘의 화신이 반달곰이라고 想定(이란 그런 것 아니냐?)하기로 하면 그렇다. 그리고는 이것에다, 무슨 말을 더 ‘가다듬고 가다듬어’ 보탤 것인가.
神舞山 자락에서 자라 우람해진, 말(V?c, skt.)의, 이 춤 사이의 말의 춤이, 춤의 말이, Akshara(sk.t, 文字)에 묶여,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言語의 묘미를 서슴없이 아는, 임우기의, 절묘한 뉘앙스를 이르키는, 非文 하나를 ‘가만히’ 빌려 쓰기로 하면,) 고맙고 축하한다. 고맙고 축하한다.
박상륭 (소설가)
유용주는 타고난 글쟁이다. 시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하다못해 같은 글쟁이들을 위해 쓴 발문이든, 그가 쓴 글은 어떤 형식이 되었거나 먼저 그의 걸고 찰진 입담이 빛난다. 그가 오랜만에 펴내는 장편소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걸고 찰진 입담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채 날밤을 새우고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그의 입담에 빠져서 문득 생각한다. 만일 그가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이러저런 죄목의 잡범으로 칠성장군이 아니라 백성장군이 되어 평생을 시종하지 않았으랴? 어쩌면 내가 그를 글쟁이가 아니라 백 개의 별을 단 백성장군의 잡범으로 만났더라도, 나는 속절없이 그를 좋아했을 터이다. 이를테면 나에게 그의 잡범이란 이 세상의 어떤 훈장 따위 세속적 명예보다도 더욱 아름답고 눈부시다. 무전취식, 공무집행방해, 노상방뇨, 폭행 등등의 잡범노릇을 통해 그는 보다 철저하게 세상의 밑바닥을 뒹굴고 핥고 빨고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면서 마침내 잡범으로써 자신의 삶의 정체성마저 획득하였으니, 나에게 그의 잡범은 차라리 무슨 구도자의 한소식처럼 성스럽기까지 하다.
송기원 (작가)
사람으로서, 또 시인으로서 유용주는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그는 에너지가 넘치는 손과 발로 시궁창 같은 세상을 만지고 주물럭거리고 까뒤집지만 그의 영혼은 항상 뜨거우면서도 자유롭게 우주를 유영하고 있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 보고』 또한 그의 이런 점을 잘 반영한 작품이다. 걸쭉한 입담과 다양한 진술 방법이 건져 올리는 것은 뼈아프고 눈물겨운 사실적 세계요, 그를 통해 최종적으로 우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결핍과 구조적 억압이 없는 인간주의적 세계에 대한 뜨거운 목마름, 혹은 그리움이다. 사람으로서의 유용주와 시인, 작가로서의 유용주가 하나로 아름답게 합치되는 걸 보는 것은 늘 즐겁다.
박범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