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이미지와 개념
한국 사회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른바 후기자본주의 사회, ‘포스트모던’ 사회로 접어들었다. 해방 이후 전개되던 산업자본주의 사회, 군정(軍政) 사회가 물러가고 여러 낯선 현상들이 우리 삶을 채우기 시작했다. 중견세대는 이제 이런 낯섦이 어느 정도 익숙함으로 화한 시대를 살고 있고, 젊은 세대는 처음부터 그런 환경 속에서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두드러지게 나타난 담론적/문화적 현상은 이미지의 범람과 개념의 연성화(軟性化)일 것이다. 모든 표현들이 이미지들로 나타나게 되었고, 우리의 의식만이 아니라 감성과 무의식까지도 이미지로 가득 채워지기에 이르렀다.
이미지는 강렬하지만 즉물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성을 직접적으로 자극해 쾌감을 주지만 사물을 늘 즉물적으로 느끼게 할 뿐 차분히 사유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는 곧 개념이 죽은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를 천천히 그리고 깊이 사유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개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념은 황폐화되고 오로지 이미지만이 현란하게 춤추고 있다.
인터넷 공간은 이런 변화를 가장 실감나게 보여 준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양한 기술적 요령들, 요란한 이미지들, 복잡한 장치들을 보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탄탄하게 다듬어진 개념과 사유는 발견할 수 없다.
일본의 한 애니메이션에 대해 글 써야 할 일이 있어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닌 적이 있다. 한국에 그 애니메이션에 관한 사이트가 제법 많았다. 홈페이지도 잘 꾸며 놓았고, 음악도 나오고, 이미지도 오락가락하고, 다들 기술적인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글은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해 봐야 그저 A4 반 장 정도였고, 그나마 몇 편의 똑같은 글이 계속 여기저기에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 짧은 글의 내용이라고 해 봤자 그저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일 뿐. 이 황폐한 풍경만큼 오늘날 한국 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달리 있을까.
외국 사이트들을 들어가 봤다. 이미지는 단출하다. 음악도 나오지 않는다. 색도 대개 간단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풍부한 텍스트들이 있었다. 어떤 사이트의 글들은 A4 20매 전후가 되는, 그야말로 한 편의 ‘논문’이라 해도 좋을 만한 글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 사이트들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이 장면에서 너무 씁쓸해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보다 한국 사회를 더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 어디 있을까. 본질적인 것,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 순수한 열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뒷전이고 온통 돈이 되는 것, 빨리 되는 것, 얄팍한 감성으로 해결되는 것, “끼”로 감당되는 것, 이런 것들만이 사회를 뒤흔들면서 돌아다닌다.
한국인들은 유목적 기질이 있어 현대 사회에 잘 맞는다는 둥, 인터넷이야말로 한국인들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둥, 한국인들은 “끼”가 있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둥,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기초가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아무리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간다 한들 무엇이 나올 것이며, 또 나온다 한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문화에 적응한 것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범람하는 이미지들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놔두지 않는다. 빌딩 위에도 동영상이 어지러이 돌아가고, 지하철에도 온갖 형태의 거대한 이미지들이 우리를 둘러싼다. 이 범람하는 이미지들이야말로, 그리고 그 이미지들에 끼어 있는 “말”과 “글”만큼 지금 우리의 삶을 단적으로 표상해 주고 있는 것들이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개념과 사유이다. 넘쳐나는 이미지들과 그 속에 숨어 사람들을 조종하는 음험한 이데올로기들을 개념으로 파헤치는 것, 그러한 사유의 노동을 통해서 제국주의 ·파시즘과 싸우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해 온 우리의 역사의식을 되찾는 것, 그래서 돈과 보수주의만이 판을 치는 오늘날의 암담한 풍랑을 헤쳐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념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뿌리가 되는 개념들이야말로 중요하다. 일상의 언어이면서도 동시에 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을 그 역사적 연원과 철학적 구조에 입각해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용기란 무엇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물음을 던졌다. 소은 박홍규가 지적했듯이, 이 물음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 그리스 인들이 ‘아포리아’라고 불렀던 지경에 처해 던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 물음들이다. 오늘날 우리도 물어야 한다. “진보란 무엇인가?”, “대중이란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자본이란 무엇인가?”, ……등의 물음들을.
이 저작은 내가 철학아카데미에서 시민강좌를 열면서 행한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부는 존재론적 개념들을, 2부는 윤리학적 개념들을 다루었다. 이 저작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철학의 고전을 배경으로 행한 강의를 담고 있거니와, 기회가 된다면 우리 시대에 좀더 밀착해 있는 개념-뿌리들도 다룰 생각이다.
이 기회에 다시 읽어보니 편집이 너무 허술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용상의 큰 변화는 없지만, 이번에 전반적으로 다듬어서 읽기 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의식’이 있는 민주화 세대가, 그리고 아직은 현실에 기입되고 싶어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2008년 봄, 逍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