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누군가와 함께 우산을 쓰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남들 눈치를 보지 않고도 딱 붙어 있을 수 있는 당당함, 우산 아래 작은 공간에서 빗소리로 둘러싸여 우리 둘만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는 고요함, 세상 어떤 향기보다도 달콤한 그만의 향기를 맡으며 길을 걸을 수 있는 황홀한 공기…. 이런 것들은 비 오는 날 그와 함께 쓴 우산 아래에서만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더. 우산 같이 쓰기는 그가 날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테스트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만약 우산을 내 쪽으로 더 기울여준다면 그만큼 날 더 생각한다는 것이고, 비를 덜 맞기 위해 우산을 좀 더 자기 쪽으로 향한다면 나보다 자신을 더 생각한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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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그 사람을 사랑했다면, 그 사람과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면 평생 그를 모르는 사람으로 놓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자고 하면 골치가 아프고, 헤어진 연인이 잘되면 배가 아프지만, 헤어진 연인이 불행해지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물론 이 말의 핵심은 한때 사랑했던 옛 연인이란 그만큼 복잡하고도 미묘한 존재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배가 아파도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그 사람을 ‘놓아줬을 때’ 가능하기에, 지나간 사랑은 지나간 채로 두는 게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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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하다.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에서 ‘가정’을 ‘연인’으로만 바꾸면 이별에도 이 명제를 적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명제는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한 연인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행복하며,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연인들은 헤어진다”로 수정해야 우리가 이별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이별을 하는 첫 번째 이유, 바로 사랑이 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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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저서 《사랑의 단상》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어떤 명백함이라는, 그런 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건, 내가 S를 이해하는 건 어쩌면 평생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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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S를 평생을 함께할 사람으로 확신한 건 첫 느낌 때문도 아니고,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그가 내 옆에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에게 나의 일생을 맡겨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어서도, 그와 살면서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답을 찾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부모의 반대를 겪는 그 시간 동안 평생 그를 웃게 해주고 싶고, 그의 인생에 보탬이 되고 싶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고 싶고,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생 반려자를 선택하는
순간, 내게는 그 사람에 대한 확신보다는 ‘내가 그를 위해 평생 무언가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이 더 중요했다.
--- p.199
백년해로가 뭐 별건가. 그냥 지금처럼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며 눈감는 순간까지도 마주 잡은 두 손을 놓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행복한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그에게 입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 그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기를 바라며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오늘도 열심히 사랑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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