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이야기를 좇으십시오. 저는 돈을 좇겠습니다. 이 길로 곧장 최한기 어른을 뵈러 갈 겁니다. 나중에라도 그 어른을 뵙게 되면 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혹여 스승님과 한솥밥을 먹은 일이 제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진은 마지막까지 속말을 내뱉었다. 도출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스승의 앞에서 앞뒤 없이 막말까지 하다니. 수한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물었다.
동진이 찾아가겠다는 최한기라는 인물은 경성에서 제일 잘나가는 변사이다. 한때 한기는 도출과 함께 명성을 날리던 조선 최고의 전기수 중 하나였다. 그랬던 그가 전기수 일을 접고 변사가 된 까닭은 간단했다. 전기수로의 삶은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전기수 일을 접고, 변사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한기에게 가겠다는 동진. 도출은 동진을 잡지 않는다. 말없이 동진을 바라보는 도출의 미소가 더없이 씁쓸했던 건, 마치 짓궂은 운명의 반복을 느꼈기 때문인 것이었을까.
수한과 장생도 동진을 향한 배신감과 서운함이 치솟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이상을 좆는다고 해도 당장 전기수의 벌이가 급급해지니 이들 역시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출의 가슴병이 악화되어 드러누워 있는 처지가 되자 수한과 장생은 형편이 더욱 어려워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수한을 보자마자 장생이 방으로 잡아끈다. 아까 낮에 최한기 변사가 도출을 보러 찾아왔다는 것이다. 한기가 도출에게 전기수 대신 변사 일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곧 문을 열 조선 극장에 연줄을 놔 주겠다고 말했단다. 수한은 한기가 잘난 체하며 어줍지 않은 거드름이나 피운 듯싶어 이야기를 그만두려는데, 장생이 더 할 말이 있는 눈치다.
“한기 어른이 너를 제자로 달라고 그랬다고. 스승님이야 제 발로 기회를 찼으니 어쩔 수 없고, 앞날이 구만리 같은 네 앞길은 막지 말라면서.”
수한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내가 두 분 말다툼에 끼어들게 된 건데 뭐 더 들은 이야기는 없고”
수한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수한은 왜 한기가 도출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도출에게 전기수는 단순한 밥벌이의 수단이 아니다. 진정한 이야기꾼은 그것을 지켜 내야 한다고, 돈이나 인기를 좇으면 이야기꾼의 이야기는 생명과 가치를 잃는다고, 도출은 늘 이야기해 왔다. 수한도 스승의 뜻을 잘 알고 있다. 수한에게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 그 무엇이자 절실한 꿈이고 바람이다. 어린 시절 수한은 어머니가 힘겹게 잠드는 모습을 보고 그 곁에서 하나씩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수한의 이야기를 듣는 날에는 깊은 잠을 주무실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수한은 본격적으로 전기수의 길을 걸어가겠노라 다짐하고 경성에 왔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도 변하는 것일까 불쑥 ‘만약 내가 변사가 된다면……’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황급히 고개를 젓는 수한이다.
며칠 뒤, 수한은 삼삼오오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참이다. 그런데 동진의 의붓동생인 이선에게 심상치 않은 이야기를 듣는다. 아까부터 누군가 먼발치에서 수한을 훔쳐보고 있다는 거다. 한기라는 걸 직감한 수한은 한달음에 그 뒤를 쫓아가 한기와 대면한다.
“얼마 전 네 동무라며 동진이라는 아이가 찾아왔더구나. 변사가 되고 싶다더군.”
벌써 알고 있는 이야기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 아이는 돈을 벌고 싶다더군. 전기수 일로는 돈을 벌 수 없으니 그러겠지. 그 아이가 무슨 일로 돈이 필요한지는 알고 싶지 않지만, 의기만은 높이 살 만했네.”
동진은 분명 한기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려고 애썼을 것이다. 몇 달을 쫓아다니며 간신히 부여잡은 기회였을 테니까. 입안에 쓴침이 고였다.
“너도 돈을 많이 벌고 싶지 않니 네 어미의 약값에 보탤 수 있을 테고. 아니, 돈을 많이 벌면 아예 경성에서 살림을 합칠 수도 있지. 어떠냐, 내 수하에 들어오는 것이”
한기는 수한에게 변사 자리를 제안하면서, 속을 알 수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수한 때문에라도 결국 도출은 변사 제안을 받아들여 극장에 나타날 거라는 것이다. 비열한 웃음을 짓는 한기를 보며 수한은 많은 말을 내뱉는 대신 스승을 향한 굳은 믿음을 다잡는다.
여름이 지나고 부쩍 추워진 어느 날, 수한은 장생을 만나러 극장에 간다. 내키지 않는 약속이었지만 장생이 하도 신신당부를 해서 어쩔 수 없이 나선 길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수한은 경찰서장과 한기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듣고 만다. 도출이 조선어연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경찰서장은, 조선어연구회에서 벌이는 일이 뭔지가 알면 다 해결된다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출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한기는 걱정하지 말라고 경찰서장을 안심시키면서 수한이라는 아이가 도출을 잡는 데 좋은 수단이 될 거라는 말을 남긴다.
수한! 자신의 이름이 대화에 나오다니! 조선어연구회 일이라는 것은 대체 뭐고, 게다가 도출을 잡아야 한다니!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수한은 한달음에 극장을 빠져나나온다.
수한이 해답 없는 물음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낼 무렵, 오랜만에 동진이 집을 찾아온다. 넉살 좋은 장생은 반가움을 숨기지 못하고 환한 기색으로 동진을 맞는다. 변사 일이 어떤지 궁금한 속마음도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근데, 변사 일은 재밌냐 진짜로 돈을 많이 벌어 혹시 이불 속에 돈뭉치 숨겨 놓고 그러는 건 아니지”
“일을 뭐 재미로 하나 남의 돈 먹기가 그리 쉬운 줄 알아”
동진이의 관자놀이가 씰룩거렸다.
“얼굴도 꺼칠한 게 힘든 모양이구나. 그래도 네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일이니까 참다 보면…….”
장생이 위로하듯 동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한이랑 붙어살더니 닮아 가는 거냐 사사건건 가르치려 들고…….”
거친 말투와는 달리 동진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동진이 다녀간 그날 밤, 도출이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다. 그러고는 도출이 수한에게 말한다. ‘이제 네 갈 길을 가라’고……. 수한은 말없이 도출의 어깨를 바라본다. 변사가 되겠다고 떠난 동진의 배신,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한기의 유혹, 이제 갈 길을 떠나라는 도출의 힘없는 제안. 지금 자신 앞에 놓인 생의 갈림길이 수한에게는 낯설고 불안하기만 하다.
날은 더욱 추워지고, 한 달 만에 만난 수한에게 이선은 극장에나 가자고 콧소리를 낸다. 수한은 못 이기는 척 이선을 따라 극장으로 향한다. 실은 공연 전에 한기를 만나 볼 작정이다. 대체 한기가 도출을 협박한 사연이 무엇인지, 왜 자신에게 부담스러운 제안을 내비쳤는지, 따져 물을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복도에서 마주친 수한을 대하는 한기의 태도가 백팔십도 다르다. 장생까지 꼬드겨 극장으로 불러낸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싸늘한 것이다. 그런 한기를 보며 수한은 어리둥절한데, 마침 막간 공연이 시작한다. 그런데 무대에 등장한 공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스승 도출이다! 도출이 극장에 오다니,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수한은 위험에 처한 스승을 구해 내고, 전기수의 꿈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동진은 자신의 바람대로 변사로서 성공할 수 있을까 언제나 넉살 좋은 웃음을 잃지 않았던 장생은 끝까지 도출의 곁을 지켜 나갈까
생의 위태로운 전환점 앞에 놓인 수한, 동진, 장생. 이 세 소년은 눈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한 뼘 자란 모습으로 삶 앞에, 시대 앞에, 이야기 앞에, 마주 설 수 있을까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