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시작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곰팡내 나는 고요한 우물 안을 내려다보며 위쪽을 쳐다보는 내 얼굴을 마주 보는 것 같다. 얼굴이 너무 조그맣고 각도가 너무 낯설어서, 그게 내 얼굴이라는 걸 알고 난 소스라치게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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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살 가게도 없고, 선물을 만들 수 있는 자기만의 시간도 공간도 거의 없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콩 한 쪽, 낟알 한 톨, 숟가락 하나, 펜, 종이 클립 하나까지 선물을 주고 싶은 상대방과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물을 마련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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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지구의 반대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정치인들은 그게 우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우리의 생활 방식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약속했다. 멀리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 전쟁은 우리의 나날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았다. 저 먼 곳의 고약한 연기처럼 우리 의식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 p.31
그 아이에게 들려줄 옛날 이야기들을 상상했다. 한밤중에도 스위치만 켜면 불이 들어오던 때, 음악과 깨끗해진 옷, 조리된 음식이 나오는 상자들이 있었던 때, 사람들이 앉아서 여행을 했던 때에 대해. 도토리를 모으고 감자를 파고 씨앗을 뿌리는 걸 가지고 할 놀이를 상상했다. --- p.351
젠장할 백과사전.
에바가 죽어가고 있는데, 백과사전은 본능 이야기만 한다. 심지어 지금도 차분하고 현학적이고 초연한 태도로 세상을 사실로 단순화해서 단조롭게 읊조리기만 하면서, 정작 우리 언니 목숨을 구할 지식은 내놓지 않는다. 백과사전이 본능에 대해서 뭘 안단 말인가?
--- p.371
나는 몇 시간이고 조그만 모닥불을 들여다보고, 때로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한다. 때로는 다른 자매들, 외톨이 여인과 샐리 벨을 생각한다. 우린 모두 잃어버린 혈연을 그리워한다, 우린 모두 홀로 숲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 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