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느 날 갑자기 몸을 돌려 당신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당신은 나의 부재를 눈치채줄까. 나를 찾고 나를 부르고 나를 걱정해줄까. 그때쯤이면 당신은 나와 함께 새로운 곡을 연주할 마음이 될까. 당신의 옛 연인을,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녀를, 그녀의 완벽한 미소를, 나는 지울 수 있을까. 그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당신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그 베일이 사라져도 당신은 나에게 여전히 이토록 애틋할까. 끝나지 않는 사랑은 없어요. 하지만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재즈처럼 매혹적인 당신에게.
--- p.28~29
그녀가 남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테이블 위에는 하얀 아스파라거스가 눈처럼 쌓여 있었다. 수프가 나오고, 초록색과 오렌지색과 크림색의 소스가 곁들여지고, 소금과 버터를 넣고 삶은 감자를 담은 커다란 그릇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일곱 명의 손님들은 아스파라거스에 소스를 듬뿍 뿌린 다음, 입맛을 다시며 차가운 화이트와인을 마셨다. 이미 아스파라거스를 입에 넣은 사람들의 입술 사이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스파라거스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남자와 눈길이 부딪치면, 급히 다른 곳을 보며 급히 화이트와인을 마셨다. 옷에 잡힌 주름에 몹시 신경이 쓰였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졌고, 그래서 식사 도중에 실례를 무릅쓰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 p.58~59
한숨을 쉬고 막 돌아서려는데, 맞은편 옥상에서 반짝, 하고 빛이 났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반짝반짝 규칙적으로 빛을 내기 시작한 그것은 타원형의 둥근 공 모양이었고, 달빛 아래 드러난 색깔은 초록색이었으며, 표면은 울퉁불퉁한, 그러니까 이를테면, 커다란 라임처럼 보였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라임이, 바로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저렇게 커다란 라임이… 있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빛을 내다니.
--- p.88~89
‘세계가 끝나는 곳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글씨가 커서 아래에서 깜박이고 있다. 그것을 클릭하자, ‘세계가 끝나는 곳’에 관한 정보, 그곳으로 가는 방법, 프로그램 등이 화면에 떠오른다.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궁금하여 뒤져보지만, 어디에도 돈을 지불하라는 이야기는 없다.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화면의 사진 한 장을 다운받은 다음, 그것을 프린트하여 침대와 가까운 곳에 두고, 잠이 들면 된다. 바다와 하늘과 다리가 있는 사진이다. 그리고 그 다리는, 바다를 향해 뻗어가다가, 갑자기 뚝 끊어져 있다.
--- p.186
“일어나. 오늘은 국경까지 가야 해.” “국경?” “그래, 어제 얘기해줬잖아. 서둘러야 해. 예약을 해뒀거든.” 국경이라니? 그런 이야기를 어제 들었던가? 나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물끄러미 엠을 바라본다. 하지만 엠은 더 이상 설명할 이유가 없다는 듯 바싹 마른 수건을 던져준다. 수건을 받아들고 목욕탕으로 들어가 수도곡지를 틀고 얼굴에 묻은 잠을 씻어내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도 국경이라니, 기억이 없다.
--- p.205
예기치 않게 목이 메어, 나는 말을 다 하지 못한다.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가만히 나의 손을 잡는다. 섀도77호가 소리 없이 다가와 따뜻한 차 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먼 하늘에서 몇 개의 눈발이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다가, 지붕이며 나무며 땅 위에 내려앉기 시작한다. 기다림의 결정들이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주고 있다는 기분이 참 오랜만이어서, 자꾸만 눈 안쪽이 뜨거워진다.
--- p.296~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