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무죽죽한 벽들과 음울한 재소자들 속에서 스티븐은 필립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것만으로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스티븐은 늘 사람들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습관이나 약점이 될 만한 것을 나중에 이용할 수 있도록 미리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필립을 처음 얼핏 보았을 때부터 스티븐은 확실히 호기심을 느꼈다. 소년티가 남아 있는 백자 같은 피부, 가는 금속 테 안경, 아기 머리카락처럼 고운 금발 머리. 필립은 책꽂이 맨 위 선반에 있는 책을 집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다. 스티븐은 곤경에 처한 롤리타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 모습에 어딘지 마음이 끌렸다. 필립은 계속 뛰어오르며 책을 잡으려 했고, 실패할 때마다 점점 더 실망하고 절박해 보였으며 뾰로통해 보이기도 했다.
스티븐은 필립보다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옆으로 다가가서 몸을 쭉 뻗고 책을 집었다. 〈연방 판례집〉 제2권이었다. 미국 항소심 판례를 모은 것으로, 낭만적인 책이 아닌 건 분명했다.
“고마워요. 키가 몇 센티미터만 더 컸으면 좋았을걸.”
필립은 스티븐이 건네는 책을 받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긴요. 도울 수 있어서 제가 영광이죠. 저는 스티브 러셀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스티븐 러셀. 제 이름은 필립 모리스에요.”
“굉장한 이름(필립 모리스는 말보로(Marlboro)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세계적인 담배 회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편집자)이네요. 무슨 관계라도?”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늘 그렇게 물어보죠.”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쪽도요. 아, 그리고 저도 여기가 싫어요.”
필립은 그렇게 대답한 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에 레크리에이션 룸에서 본 적 있어요.”
“그래요?”
“네. 그쪽이 먼저 말을 걸기를 바랐는데……”
“무슨 일로 여기 들어온 거예요?”
“렌터카를 빌렸는데 너무 오래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요? 그럼 자동차 절도죄?”
“아니, 서비스 절도라던데요. 그쪽은 무슨 일로?”
“보험 사기요.”
“저런. 둘 다 엉망이네요. 그렇죠?”
“이나마 다행이죠.”
“말도 안 돼요. 너무 끔찍해서 못 견딜 처지인걸요. 적어도 저한테는 그래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오늘 그쪽을 못 만났으면 더 끔찍했을 거란 뜻이에요.”
“그래도 첫 만남 장소로 여기는 최악이잖아요. 게다가 저는 수줍은 편이거든요.”
필립은 교태를 부리듯 고개를 숙였다.
“전 수줍은 사람이 좋아요.”
스티븐이 말했다.
“재미있는 분이시네.”
필립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진지하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수줍은 사람이 좋아요.”
스티븐이 한 번 더 강조했다.
“저도 그쪽이 마음에 들어요.”
“우리, 말하는 게 초등학생 같아요.”
짐짓 부끄러운 척 스티븐이 말했다.
“좋은 인연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필립의 말이었다.
“좋은 인연이 될 겁니다. 얼마나 좋게 만들지는 우리 손에 달렸죠.”
스티븐이 말했다.
“어디 출신이에요?”
“버지니아비치. 하지만 보험 사기로 체포되었을 때는 휴스턴에 살고 있었어요. 그쪽은?”
“아칸사스. 그렇긴 해도 휴스턴이랑 갤버스턴에서 살았었죠. 체포될 때는 갤버스턴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고요.”
“나도 낚시 좋아해요. 대체 어떤 놈들이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을 체포한답니까?”
“얘기가 길어요. 나중에 들려줄게요.”
스티븐은 필립에게 건넨 〈연방 판례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다음, 필립에게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다.
“제가 변호사거든요. 찾는 게 뭐죠?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필립은 연방 법원에 항소하려는 감방 친구를 돕고 싶다고 설명했다. 그 친구는 도서관에 있는 다른 대여섯 명의 재소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 대부분이 그렇듯 빠져 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스티븐은 유식해 보이는 어조로 말했다.
“글쎄, 항소는 할 수 있겠지만 이기기는 힘들 것 같아요. 우선, 인신보호법 제11조 7항에 따라 주 법원 구제를 신청해야 하거든요.”
필립은 스티븐의 이야기를 노란색 수첩에 열심히 휘갈겼다.
“감방은 어디죠?”
스티븐이 물었다.
“9 A 5. 그쪽은요?”
“9 A 4.”
스티븐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옆에 있었네요!”
“그러게요. 하지만 수천 킬로미터만큼 멀 수도 있죠.”
“나랑 같이 9 A 5에 있으면 좋겠어요.”
필립이 말했다. 그는 이미 스티븐과 스티븐이 내뿜는 자신감에 빠져들었다.
“나도요. 음,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만약 성공하면, 정말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할게요.”
“내가 그동안 어떤 일들을 성공해 왔는지 못 봐서 그래요.”
스티븐이 허세를 부렸다. 허풍을 치고 있었지만, 필뎸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감옥에 와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죠. 그쪽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 약속해요. 내가 힘닿는 데까지 도울게요.”
도서관 배정 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두 남자는 이름과 재소자 식별 번호를 적은 쪽지를 교환하고 나중에 레크리에이션 룸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데이트라고 생각해도 돼요?”
필립이 물었다.
“그럼요. 데이트죠.”
스티븐이 웃으며 대답했다.
“와, 구치소 레크리에이션 룸에서 첫 데이트라니 정말 낭만적인데요?”
“레크리에이션 룸에서 만나요, 필립 모리스.”
그 말과 함께, 똑같은 형광 주황색 죄수복을 입은 두 수감자는 각자의 감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람을 빨리 파악한다고 자부하던 스티븐은 이미 필립을 보호하고 부양하는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필립은 스티븐의 법 지식에 감명을 받았고, 자신이 관심을 샀다는 사실에 우쭐했다. 필립처럼 때때로 속수무책인 사람의 눈에는 자기 생각히 확고해 보이는 스티븐이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필립은 새로운 친구에게 벌써 신세를 진 기분이었고, 이미 꽤 반해 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