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효는 1968년 《신아일보》《불교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직』과 한국대표명시선100『아버지의 힘』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데이트』 유자효시선집 『성스러운 뼈』등이 있다.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현대불교문학상을 받았으며 지용회장, 구상선생기념사업회장, 서울시인협회회장, 시와 시학 주간을 맡고 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홍색 두툼한 잠바를 입은 손 등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신주머니를 들고 벌떡벌떡 뛰는 손자 몇 반이냐고 물으니 1학년 3반이란다 짝꿍이 누구냐고 물으니 여자란다 예쁘냐고 물으니 예쁘지 않아도 된단다 학교 좋아 물으니 엄청 좋아한다 할머니 나 계단을 열다섯 개나 올라갔어요 하고 씩씩하게 말하는 손자 학생이니 씩씩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선사 간행『 엘리사벳의 기도』
이 시를 읽으며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습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기 때문에 재미있는 시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손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경이롭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하나의 인간으로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경이들을 보여 주는 것일까요. ‘등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신주머니를 들고 벌떡벌떡 뛰는 손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부디 평화롭기를,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해 봅니다. ---「1. 시와 함께 다시 봄을 맞다」중에서
혼수 손세실리아
산업연수원생 자격으로 한국에 와 사랑에 빠진 타잉 홍과 남 프엉은 둘만의 부부서약을 마친 뒤 쪽방 얻어 신방 차리기로 합의했는데 본국에 송금하고 월세 내고 나니 빈털터리인 거라 최소한의 세간 장만할 여력조차 막막한 거라 곰곰궁리 끝에 공단 인근 모텔 빈 객실에 잠입해 집기 훔쳐 나오다 붙잡혀 경찰서로 넘겨졌는데 장물 목록을 기록하던 경장 쯧쯧… 쯧쯧… 혀만 차는 거라 신랑은 긴 생머리 신부를 위해 헤어드라이어와 업소용 샴푸 린스를 신부는 잠 많은 신랑을 위해 디지털 알람 벽시계를 -실천문학사 발행『꿈결에 시를 베다』
우리 주변엔 외국인들이 많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습니다. TV에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이 여럿 있을 정도입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온 이방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꿈을 이루고 있을까요? 이 시에 등장하는 젊은 남녀는 이름으로 보아 베트남인인 듯합니다. 베트남이라 하면 우리로서는 파병의 기억이 있고, 그 후유증과도 같은 혼혈 2세들도 있어, 죄스러운 듯 부끄러운 곳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신방 세간 마련을 위해 ‘공단 인근 모텔 빈 객실에 잠입해’ ‘신랑은 긴 생머리 신부를 위해/헤어드라이어와 업소용 샴푸 린스를/신부는 잠 많은 신랑을 위해/디지털 알람 벽시계를’ ‘훔쳐 나오다 붙잡혀/경찰서로 넘겨졌’다는데, 이 가난한 신혼부부를 꼭 경찰에 넘겨야만 했을까요? 모텔 주인이 신혼 선물로 줘 보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은 쟁반을 훔치다 잡혀 온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줘 보낸『레 미제라블』의 미리엘 신부처럼… 이 시집에는 다문화인들을 다룬 시들이 많군요. 일찍 잠 깬 새벽에 이 시집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 왔습니다. 임옥상 미술가의 발문 제목 ‘찐, 짠, 찡’ 그대로였습니다 ---「2. 시집 열한 권을 읽으니 봄은 가고」중에서
봄의 수염 금시아 제 주둥이에 몇 가닥 아지랑이가 붙어 있는 것도 모른 채 낮잠을 잔다 단꿈의 흔적 점점 아롱거린다 꼬리를 살랑살랑, 잠꼬대를 하는 게지 엄마의 젖을 물고 아지랑이는 아기 고양이의 수염이 되는 거지 -시와표현 간행 『툭,의 녹취록』
이 작품을 읽으며 요절한 천재 시인 고월 이장희의「봄은 고양이로다」를 떠올렸습니다. 고월의 시도 그 관찰이 탁월하지만 금시아 시인의 관찰도 그에 빠지지 않습니다. 금 시인의 시는 회화를 연상시킵니다. 유종인 선생은 해설에서 ‘고대 원시 동굴 벽화에는 언어적 기호 문양과 형상적 회화 형태가 공존했는데 언어와 그림이 독립된 기호체계나 미적 장르로 떨어지지 않고 일정한 혼재 속에서 너나들이했다’고 명쾌하게 지적했습니다. 금시아 시인은 그림의 기호 체계가 시적 표현 속에 살아 있는 귀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금 시인의 시에서 벽화에서 만나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나 현대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스케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시와 그림은 사촌간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