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이름이 싫다. 마사. 성경에 나오는 이름이지만 애들은 바보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은 나를 ‘아서’나 ‘마’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그건 운이 좋을 때 얘기고 대개는 ‘누더기 앤’이라고 부른다. --- p.7
나는 식탁에 않기 전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바로 ‘혐오’의 밥을 챙겨 주는 일, 내가 맡은 집안일 가운데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애들에게 머리칼을 잡아 뜯기거나 놀림을 당하고, 뒤를 쫓기는 일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 p.9
누더기 앤, 그 애의 별명이었다. (……) 그 애 옷차림은 좀 유별났다. 다른 애들과는 달랐다. 무슨 제복 같은, 밤색 스웨터에 회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엄마가 집에서 만들어 준 옷이 분명했다. 아니면 할머니든지. --- p.10
체벌은 아주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 사실이다. 남의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내 몸에 남은 자국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체벌 자국은 항상 엉덩이에만 남기 때문에 체육시간을 물론, 수영시간에도 보일 리가 없다. --- p.13
나는 그 무엇보다 대화할 상대를 원한다. 내 삶에 대해. 집에서의 내 생활에 대해. 애들이 나를 왜 싫어하는지 나도 잘 안다. 그 애들 눈에는 내가 괴상해 보이겠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내 마음은 그 애들과 똑같다. 유행가를 좋아하고, 텔레비전을 좋아하고, 새 옷을 좋아하지만 가질 수 없다. 내겐 모두 금지된 것들이다. --- p.19
나는 마사가 좋다. 이유는 모르겠다. 애들 말대로 마사가 특이한 건 사실이지만 특이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놀림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특이한 사람을 알게 되면, 정말 그 사람을 잘 알게 되면, 그렇게 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 p.52
‘행복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다.’ 불행하다는 뜻일까? 언니가 불행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니는 자유롭고, 아네트 언니도 있는데. 나에게 스콧이 있듯이. 이 엽서를 지난 주에 받았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아니, 언니, 난 행복하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 나는 침대에 누워 이 즐거운 답장을 언니에게 보낸다. --- p.88
어머니가 자주 인용하는 경구 가운데에 ‘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 보아라.’는 말이 있다. 침대에 누워 내가 누리는 축복을 찬찬히 헤아려 보았다. 하나, 스콧. 둘, 메리 언니. 셋, 도리스 아주머니. 물론 어머니는 이들을 축복이라고 보지도 않겠지만, 이런 경구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축복이 다른 이에게는 혐오가 된다.’ '마사서' 말씀이다. --- p.137
‘난 너랑 사랑에 빠졌어. 우린 겨우 열네 살이라고 말하겠지만 진심이야. 난 항상 네 생각뿐이야. 널 지켜 주고 싶어.’ 이런 사실을 알면, 엄마 아빠가 과연 뭐라고 할지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아, 인생, 삶은 어렵구나. --- p.169
나도 함께 구출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깡마르고 초라한 이방인에게 손을 맡긴 채 길을 따라 달려갔고, 시동이 걸린 고물차 운전석에는 또 다른 이방인이 앉아 있었다. 정신없이 뒷좌석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본 듯 멍하니 계단에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 p.198
나만 남겨졌다. 마사는 가 버렸고, 마사를 사랑했기에 행복한 척하지는 못하겠다. 아, 엄마가 뭐라 할지 잘 안다. 너는 사랑에 빠질 수가 없어, 스콧. 사랑이 뭔지도 모르잖아. 글쎄, 어쩌면 엄마 말씀이 옳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거나,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다를지라도, 나는 똑같이 마사를 사랑했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으며, 종류야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한 가지 사랑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테니. 내 생각하고 있니, 마사? --- p.201
수요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수요일 오후는 아네트 언니가 쉬는 날이라 인터넷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아, 인터넷. 내 첫 이메일의 주인공, 과연 누굴까?
--- p.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