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으면 맥주가 마시고 싶다. 이 책을 펼친 독자가 몇 꼭지를 읽고 맥주 한잔이 생각난다면 나는 무척 기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읽고 독자가 소중했던 자신의 여행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면 더욱 좋겠다.
(들어가는 글 중에서쪽)
이제 실력을 보여줄 시간이다. 차범근이 독일에서 한 것처럼,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한 것처럼 나도 그들에게 ‘코리아(Korea)’에서 온 첫 번째 선수다. 여기는 인도 고아의 베나울림이다. 그리고 나는 용병이다.
(본문 14쪽쪽)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몸을 비벼가며 축구를 하고, 일부러 혼자만 있는 숙소를 골라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따돌리는 장소로 내몰고, 술에 취하며 영화와 추억을 어루만지는 것이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여행이다.
(본문 19쪽쪽)
이렇게 우리를 초대해 주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이해가 잘 안 돼서 물어보곤 한다. 같은 질문을 이틀 전 아저씨에게도, 이날 쥬디에게도 했다. “왜 낯선 사람들에게 식사와 샤워 그리고 잠자리를 제공해주나요?” 대답은 항상 같았다. 이제는 그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집에 가만히 머무르며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죠. 효율적인 공짜 여행 아닌가요?”
(본문 37쪽쪽)
물리적인 고통과 만족은 나의 정신도 단련시키고 살찌웠다. 6,000km든 1,500km든 기록과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세상에 많고 각자 자기 몫의 여행을 하면 된다. 중요한 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정 원하는, 실패도 두렵지 않은 ‘나만의 인생’이라는 여행을 떠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뵨문 46쪽쪽)
점점 현실과 더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책임감과 죄책감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래서(?) 아내가 잠든 후 몰래 농구를 보다가 결정해버린 것이다. ‘농구 보러 미국에 가겠다’고. 직접 미국 가서 농구 한 번 보면 농구 접고 멋진 가장이 되겠다고. 과자 먹고 사탕 먹고 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아이스크림 먹겠다고 떼쓰는 어린애처럼 나는 그렇게 미국으로 떠났다.
(본문 51쪽쪽)
미국 여행 갔다 오면 농구도 접고 멋진 가장이 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여전히 아내는 철없는 날 챙겨주느라 고생이고 농구는 그때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여행 다녀왔다고 사람이 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퇴근길에 노을을 볼 때면 바다를 같이 바라보던 아내를 내가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된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서 천국의 이야깃거리는 바다밖에 없다고 하던데 나도 미국 여행에서 하나 제대로 된 걸 건진 느낌이다.
(본문 59쪽쪽)
예쁜 여자 옆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좌석 선택이 중요하다. 비행기 좌석은 한 줄이 보통 창가를 기준으로 2-4-2로 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노리는 건 바로 창가에 있는 복도 좌석이다. 결국 내 옆 창가 자리에 앉는 사람은 나처럼 혼자서 오는 사람이며 여자들은 창가 석을 선호하기 때문에 내 옆자리는 여자가 앉을 확률이 높다. 이 기준에 맞게 좌석을 예약했다. 이제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면 된다.
(본문 67쪽쪽)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는데 여행의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으며 비행기에서도 역시 전혀 잠을 자지 못했다. 밀라노행 비행기를 탔다. “예쁜 여자 옆자리”와 “운명적인 만남”은 이제 생각할 기력이 없었다. 다음 여행 아니, 다음 생애를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본문 69쪽쪽)
독일에서 온 제니, 프랑스에서 온 존, 영국에서 온 제인. 다들 국적이 달랐다. 이야기 도중 왠지 이 친구들에게 내가 한국인임을 자랑하고 싶었고 한국을 좀 더 깊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영어로 “한국의 땅콩 막걸리 알아? 엄청나게 유명한 한국 술이야! 다들 마시러 가자!” 이렇게 외치자 모두 땅콩 막걸리를 외쳤고 “그래, 가자!” 라고 또 외쳤다. 모두에게서 환성이 터졌다. 바로 어제 지희 소개로 처음 갔던 포장마차에 두 번째 가는 것이지만 소개하는 자신감은 제주도 사람 이상이었다. 그렇게 모두 바다가 보이는 포장마차 테이블에 앉았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 멋진 곳에 난 처음 와 봐!”
(본문 79쪽쪽)
돌발적인 제주도 여행은 취업으로 힘들었던 그 시절을 멋진 기억으로 남게 해 주었다. 제주도에서 돌아와서 내 생각은 많이 바뀌었다. 틀에 박혀있던 나를 집어 던지고 자유를 꿈꾸게 되었다. 꼭 회사를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일이 너무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맙다 제주도!
(본문 85쪽쪽)
첫인상에 대한 충격이 얼마만큼 강렬한지 표현하자면 여행 전 인터넷상에서 이곳에 대한 사진을 검색했을 때의 놀람보다 당연히 크고 여행 후에 다시 검색하거나 심지어 내가 찍은 사진을 봐도 그 충격을 재현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진 따위는 ‘찰나의 순간’도 되돌릴 수 없으며, 오로지 정직하게 두 발로 이 땅에 선 자만이 그 감동을 알 수 있다.
(본문 88쪽쪽)
숙소를 고를 때는 반드시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 햇빛이 잘 들어야 빈대가 없으니 커튼을 다 걷어 내봐야 한다. 남향이건 북향이건 상관없이 방이 밝아질 만큼의 빛의 양이 필요하다. 전등을 켜서 불이 죽은 전구는 없는지 봐야 하고 변기 물은 잘 내려가는지, 수압은 괜찮은지, 모기가 들어올 구멍은 없는지, 문에 잠금장치를 할 수 있는지, 빨랫줄을 걸만한 튀어나온 무언가가 있는지 정도는 기본이다. 농담 삼아 더하자면 침대 밑에 망자가 누워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면 좋다. 내 침대가 동시에 누군가의 관으로 쓰일 수는 없으니까.
(본문 90쪽쪽)
그 옛날 저 평원에서 한니발이 싸웠다. 오늘날의 평범한 20대, 30대의 고민은 주로 취업과 진로, 그리고 연애와 결혼이다. 취업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로 힘들어한다. 그게 보통 우리의 모습이고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었을까? 현재의 우리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느낌이다.
(본문 110쪽쪽)
하지만 나는 한니발이 아니라 로마 측 총사령관인 ‘파비우스 막시무스(Quintus Fabius Maximus)’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 연이은 패배로 비상체제에 돌입한 로마는 명문 귀족 출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냉정하고 침착한 파비우스 막시무스. 그는 자신이 한니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구전으로 한니발에 맞섰다.
(본문 111쪽쪽)
불과 하루 전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이탈리아 국토대장정 캠프팀’의 첫 집결이 있었고 그때 총원 8명 중 나를 제외한 7명이 모두 여자임을 알았다. 그들과 멋쩍게 서툰 영어로 인사를 나누면서 과연 이들이 330km를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을 품었다. 이 캠프에 지원하기 위해 참가신청서를 작성할 때 자신의 체력적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칸이 따로 있었고, 이 때문에 고생을 즐기는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팀을 짐작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편견이었다. 이따금 종아리 근육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덕분에 이 순간 가장 체력이 의심되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느꼈다. 내가 유독 다른 팀원들보다 힘들어하는 것은 내 체력이 약해서는 아닐 것이다(‘동양인 남자는 저질 체력’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순 없었다!).
(본문 119쪽쪽)
나는 조용히 캠프를 빠져나왔다. 50걸음쯤 갔을까, 뒤를 돌아보니 아직 짐을 챙기느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클라라, 멜라니, 루박, 안드레아, 멜리샤……. 모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트린은 그 와중에도 멀리서도 분간이 가능한 특유의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잠시 돌아가 작별인사를 나눌까 고민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나는 다시 발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로마에서 알토나까지 걷는 이탈리아 여정은 끝이 났지만, 다시 새로운 나만의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본문 139쪽쪽)
회사에서 구해준 집은 지도에도 안 나오는 외곽이었으며 기사가 하는 말은 도대체 알아듣지 못하겠고 생명줄과 다름없는 인터넷은 언제 연결될지 몰랐다. 하지만 상하이에 도착한 지 불과 몇 시간 지났을 뿐이다. 모두의 예상(?)대로 나는 낮에는 청년 CEO, 밤에는 상하이 사교계를 주름잡는 한국에서 온 훈남이 될 것이다. 나에게 향수병은 나의 매력을 더욱 배가시키는 향수가 들어있는 병일 뿐이었다.
(본문 144쪽쪽)
상하이에 있었던 ‘1,686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는 않을테니까. 미래와 현재보다 과거가 좋은 점은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계속 상하이에 머무를 것이다. 내 머릿속 타임머신을 타고 와이탄으로, 날씨 좋은 주말이면 무작정 걸었던 예쁜 카페가 즐비한 프랑스 조계지, 나와 그녀가 무척 좋아했던 허름한 국숫집으로 향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오늘은 단순히 2012년 5월 24일이기 전에 ‘아름다운 나의 도시 상하이를 가장 사랑한 날’이었다.
(본문 152쪽쪽)
떠나기 전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설렜다. 설렘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그리고 참 신비로운 감정이다.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이 감정이 절정에 이르는 시점은 늘 그 전날이다. 쉽게 예측하고 재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지만, 설렘만은 정해진 시간에 정확히 심장을 두드리는 신비로운 감정이다.
(본문 159쪽쪽)
나는 삶을 지탱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보통사람들의 삶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결핍된 채로 살아가는 것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꿈은 늘 멀어 보이고, 그 꿈을 향해 손을 뻗기엔 내 팔이 너무 짧아 보이는 것 말이다. 결핍에 대한 망각을 위해 나는 여행이 필요했다.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 비행기 안에서 생각했다. 삶이 마치 여행 같으면 좋겠다고.
(본문 166쪽쪽)
극단적으로 여행은 두 가지로 나뉜다. 좋은 호텔에 머무르며 유명 관광지를 구경하고 여유를 즐기는 여행과 10위엔元, 20위엔元 정도의 적은 돈에도 벌벌 떨며 현지인의 생활을 체험하는 여행이 있다. 개인적으로 후자를 더 즐긴다.
(본문 174쪽쪽)
퇴근 후엔 보통 여행객들이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러는 것처럼, 숙소 근처 국숫집에서 술 한 잔에 국수를 먹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운 좋게도 숙소 주변 경치는 좋은 편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오른편은 서양식 건물, 왼편은 중국식 아파트와 가게들이 있었다. 한꺼번에 동서양을 모두 만끽할 수 있었다. 늦은 퇴근길에 그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나에겐 여행이었다.
(본문 178쪽쪽)
일하면서 캘리포니아 이곳저곳을 구석까지 돌아다닐 수 있어서 나에겐 정말 행운이었다. 어느 날에는 드라마 ‘상속자들’ 촬영지인 ‘헌팅턴비치’를 구경할 수가 있었고 또 어느 날에는 사막을 달리면서 큰 밸리(계곡)를 볼 수도 있었다. 또 큰 쇼핑몰 MACY에서 잠깐씩 쇼핑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매일 다른 지역의 거래처들을 돌아다니며 항상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본문 194쪽쪽)
많은 곳을 돌아보고 파티를 즐긴 탓에 한국에 올 때는 정작 50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손에 쥔 50불보다는 보이지 않는 5만 불 이상의 경험을 하고 왔으리라 믿는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선 좀 더 자유로워진 영혼 때문인지 남들이 원하는 직장보다는 내가 잘하고 자신 있는 일본에서 근무하면서 배웠던 료칸 근무 경력을 살려 일본 온천 여행을 소개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언젠간 또 미국에서 일하며 쌓았던 경험도 살려서 일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본문 202쪽쪽)
그곳에서 웃고 떠들었다. 우린 주로 일본어로 대화했지만 종종 나는 혜영이와 주연이에게 한국어로 말했다. 다나카가 궁금해하면 다시 일본어로 말해주면 그만이었다. 나도, 주연이도, 혜영이도 다나카와 일본어로 말하는 데 익숙했다. 이건 언어 능력의 문제뿐만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만큼 다나카를 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본문 214쪽쪽)
한바탕 뛰어다닌 후 주연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느새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어두운 하늘과 바닷가를 바라보는 사이에 테마파크 전체에 음악이 깔렸다. 어둑해진 풍경에 음악이 흘러나오니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하늘, 바닷가, 놀이 기구, 예쁜 조명 빛이 음악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7월의 토요일 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두운 밤, 물, 놀이기구, 어둠을 비추는 조명 빛……. 꿈을 꾸는 것 같고 황홀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끼고 싶어 했던 그런 느낌.
(본문 221쪽쪽)
베이징 날씨는 계절별로 장단점이 뚜렷하다. 이곳 날씨를 계절별로 살펴보면 5월 날씨는 성질 사나운 먼지 바람이 잦아서 길을 걸어 다니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린위탕林语堂의 베이징 이야기에 나오는 먼지 가득함을 나타내는 말인 ‘무풍삼촌투 우천만지니(无风三寸土,雨天满地泥)’가 가장 맞아떨어지는 시기가 5월이다.
(본문 225쪽쪽)
만리장성을 관광하는데 눈앞에 거대한 벽이 있는데도 하늘이 뿌옇고 장벽도 뿌옇다는 당신의 말에 흐르는 눈물을 참았다. 혼잣말로 ‘야, 이 자식아, 울지 마! 의연해라!’를 외치고 또 외쳤다. 자식이 걱정할까 봐 맑게 보이지 않는 시력 상태를 비밀로 했던 당신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울음을 참느라 나도 모르게 일그러졌던 얼굴, 그리고 그걸 보고 모른 척 넘겨 준 당신. 만리장성은 그런 우리를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다.
(본문 229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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