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로봇이다!”
인형이라도 들려 있어야 어울릴 다해의 손에는 다름 아닌 로봇이 있었다. 시선이 로봇에 꽂히자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해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어림없다는 듯이 재빨리 자신의 등 뒤로 로봇을 감췄다.
“그 로봇, 니 꺼야?”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물었다.
“이거? 응.”
다해는 감추고 있던 로봇을 슬그머니 앞으로 내놓으며 대답했다.
“로봇이다!”
반사적으로 내 손은 로봇을 만지려 했다. 이번에도 로봇은 재빨리 다해의 등 뒤로 숨었다. 허공에 멈춰 선 내 손이 민망했다.
“너, 이름이 뭐야?”
다해가 물었다.
“이루다.”
“이루다? 예쁜 이름이다.”
진심으로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는지, 다해는 방긋 웃었다. 동시에 로봇을 들고 있는 손이 앞으로 나와 웃고 있는 입을 가렸다.
- pp. 20
“그럼 여기, 이 사람은 누구니?”
“저예요.”
“너라고? 사막에서 뭐 하고 있는 건데?”
“달리고 있어요.”
“응?”
“네?”
“달리고 있다고? 사막에서? 왜?”
담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무심코 던진 그 말에 아이들이 웃어댔다. 내 꿈이 조롱당하는 기분이다.
“다들 조용!”
그런 내 감정을 읽었는지 담임은 곧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다정한 말투로 날 위로하듯 말을 돌렸다.
“오늘 그림은 가수, 배우, 과학자, 대통령처럼,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그리는 거예요. 그게 꿈이라는 거야. 루다가 이해를 잘 못했나 보네.”
담임은 서둘러 날 자리로 돌려보냈다. 제대로 이해했거든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타카마사막을 달리는 사람이라고요.
- p. 52~53
맞네. 그때부터 줄곧 다해는 내 여자친구였네. 줄곧 사귀고 있었네. 다들 알고 있었던 거야? 나만 몰랐어? 지난 수년간 여자친구인데도 여자친구인 줄도 모르고, 여자친구처럼 대하지도 못했네. 그래. 나 바보네. 바보 맞네.
“그렇다면…….”
억울한 마음에 손을 내밀었다.
다해는 한참을 말없이 내민 그 손을 내려다본다. 한참을 보더니 탁, 하고 내 손바닥을 내려친다. 그러고는 방긋 웃는다.
“됐네요. 지금까지 몰랐으면서.”
다해는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손을 잡지도, 나란히 걷지도 않았지만,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 있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함께 걸었다.
조금은 수줍게 느껴지는 발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다해를 따라 걷는다.
짙은 벤자민 향기가 바람에 묻어 뒤따라 걷는 내게로 날아왔다.
다해는 나의 ‘첫 기억’이다.
- p. 111
“그러니까 말이야…….”
이미 잡을 수도 없는 저만치 높은 곳에 올라선 것도 내게는 버거운데, 다해는 더 먼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손을 뻗어 봐도 닿을 수 없는 저편에 서 있다.
─ 뭐라고? 크게 말해줘.
“그러니까, 나…….”
다해 곁에 서면, 난 너무 작아져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무너지는 자존감이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긴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면. 아니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똑같은 열아홉 살일까?
─ 크게 말해! 루다. 미안해, 안 들린다고.
“만나고 싶지 않아, 온다해.”
순간, 공간 속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흐르던 공기는 멈추고 희미한 이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긴 침묵이 이어졌다.
- pp. 143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