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30살 정도 먹은 여성의 생후 1개월된 아기 환자를 보러 갔다. 옆에 서 있는 남편은 방금 막 의무적으로 시술되는 정관수술을 받고 온 상태였다. 마취제 없이 수술했다고 불평하는 남편을 상대로 몇 마디 나누다가 별로 내켜하지 않는 아기 엄마를 설득해 물어 보니 병원에 오기 전에 먼저 주술사에게 갔었다고 했다.
"주술사들은 신통한 능력을 갖고 있어요. 단번에 병명을 알아맞히고, 귀신에게 도움을 청해서 병을 고치지요. 이번에 우리 아기는 못 고쳤지만……."
MSF는 이곳에서 20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도 병원 하나를 더 재건축했는데, 프랑스인 부부와 베이징에서 교육받는 젊은 의사가 진료를 맡고 있었다. 그 병원은 11만 명이 거주하는 주변 지역을 담당하기로 되어 밤낮으로 환자가 들끓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방문했을 당시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서양 의술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를 얻는 일입니다."
그 병원에서 수 년째 일하고 있는 프랑스 의사 마르셀 로스 씨가 말해주었다. 로스 선생은 부부가 함께 자원봉사 형식으로 중국에 와서 일하고 있는 50대의 의사로, 중국 시골의 건강 관리 문제가 굉장히 심각하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건강관리 수준이 매우 낮습니다. 아프리카보다도 심각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의료 체계가 조직화되어 있고 의사나 관련 종사자들의 수준도 높지만, 중국은 둘 다 아닙니다."
--- pp.240-241
오늘의 중국 농민들이 가난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의료제도 때문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들은 적이 있다. 치료비를 내기 위해 빚을 지고, 그에 따른 이자도 내야 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생긴 자조적인 말이었다. 의사들이 처방을 잘못 내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심지어 설사병에 마취제로 사용되는 아트로핀을 처방하여 어린아이가 죽은 경우도 있었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맨발의 의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피로에 아미노산이 함유된 정맥주사를 놓고, 비세균성 감염에 항생제를, 일상적인 감기에 부신피질 호르몬제와 다량의 항생제를 처방하고 있다고 한다.
1995년에 보건부는,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 중 연간 250만 명이 잘못된 처방으로 사망했으며, 10만 명 가량이 처방약의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무차별적인 약품 남용으로 인하여, 그 중에서도 특히 항생제 남용으로 인해서 연간 1백만 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언어 능력과 청각에 장애를 입는다고 이 보고서는 덧붙이고 있다. 이같은 결과는 결국 무자격 의사들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불과 3개월이나 길어야 1년 정도의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 교육을 받고 환자 진료에 나서는 상황에서 이런 부작용이 안 생긴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 p.245-246
베이징 시내에 개장한 중국 최초의 서양 식당에서 젊은이들이 젓가락으로 잼 바른 빵을 먹는 것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고, 티켓과 외국환 증명서가 있어야 입장이 가능한 수입품 가게를 단지 구경만이라도 하기 위해 장사진을 치는 중국인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단순히 애국심에 호소한다고 해서 막아지는 일이 아니었다.
이제 일반인들도 코카콜라와 외제 담배 정도는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코카콜라는 합법적으로 수입된 것인 반면, 담배는 대부분 밀수된 것이어서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이 무척 저렴했다.
코카콜라는 중국에서 연간 성장률이 1980년대에 30~40%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고 있는 시장이었다. 1995년에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코카콜라사의 최고경영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소감을 밝혔다.
"중국인들은 우리를 미국사람으로 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네 중국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코카콜라는 미국 제품이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상징물이기 때문에 미국인처럼 되기 위해 코카콜라를 마십니다."
외제품은 신분의 상징이 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신뢰성의 대명사가 되었고 국내산 제품의 부실함이 더욱 비교되고 드러나는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국내산 TV가 고장나거나, 배터리가 샜다거나, 신발 밑창이 떨어졌거나, 맥주병이 터졌거나, 술을 먹고 장님이 되었거나, 특허를 받은 약을 먹은 환자가 죽었다거나 하는 경험들을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뇌리엔 중국산은 불량하고 허물이 많은 상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1985년, 당은 할 수 없이 소비자보호원을 설치하여 하자가 있는 국내 제품을 신고할 수 있게 했지만 국산 제품의 풀질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키려는 노력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들의 상품은 질적으로 외국산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중국은 1980년대만 하더라도 모든 상황이 엉망이었다.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구할 수 있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상점도 별로 없었고, 상점에는 있는 물건보다 없는 물건이 더 많았다.
내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베이징의 어느 호텔에 있는 오리요리 전문점으로 친구를 초대했는데, 그 식당에서 유일한 메뉴인 오리 요리가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모처럼 모인 사람들과 함께 그냥 식당을 나온 적이 있었다.
--- pp.193-195
1957년에 마오쩌둥은 옌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리서치 학교' 학생들에게 당에 유익한 비판을 하라고 권유했다. 이른바 백화운동의 연결선상에 있는 발언이었다.
그러자 많은 학생들이 당에 대한 비판조의 포스터를 붙이고 연설을 했고, 그것이 바로 함정이었다. 당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의 시간이 끝나고 곧 단속이 시작되어, 많은 지식인들이 고문을 당하고 트로츠키주의를 따르는 혁명가이거나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스파이임을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유명한 여류작가 딩링도 있었다. 남편을 국민당원이 쏜 총에 잃고, 그녀 자신도 옌안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녀는 옌안에서 자유일보 편집장으로 일하다 우파분자로 지목되어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두 번째 남편인 천밍과 함께 헤이룰장성의 한 개간농장으로 보내졌다.
1942년에, 마오쩌둥은 '문학과 예술에 관한 옌안 포럼'으로 알려진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
'예술은 모든 계급의 최상의 자리에 위치하며, 정치와는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것이다. 문학이란 혁명의 물림장치이다.'
그러고 나서 마오쩌둥은 지식인들의 역할은 프롤레타리아 계층과 대중을 위해 일하는 황소와 같이 허리를 굽혀서 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 pp.268-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