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광장 한가운데에서 물에 흠뻑 젖은 갈색 제복을 입은 돌격대(SA)의 밴드가 광장 위를 텀벙거리며 행진하고 있었다. 닫힌 차창을 통해 옛 나치 행진곡을 연주하는 드럼과 트럼펫 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비 때문에 어깨를 움츠린 채 예술아카데미 바깥에 모여서 구경하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 이런 퍼레이드를 만나지 않고 베를린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했다. 엿새 후면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이자 공휴일인 총통탄신일이라 제국에 있는 모든 밴드란 밴드는 행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차창의 와이퍼가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양이 마치 메트로놈이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결정적 증거를 보게 되는군.” 마르크가 군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군가만 나오면 독일인들은 미친다는 증거 말이야.” --- p.25
이건 미친 짓이야. 마르크는 생각했다. 완전히 미친 짓이야. 그는 대문으로 무작정 뛰지는 않았다. 갑작스런 움직임만큼 사람 시선을 잡아끄는 것도 없는 법이다. 그는 관목 더미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우체통에서 소포를 집어 들고 어슬렁어슬렁 대문을 나섰다. 금방이라도 뒤에서 누가 쫓아올 것만 같았다. 아니면 총알이 날아오든지. 하지만 바람에 나무가 흔들리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침내 차를 세워둔 곳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마르크는 자신이 손을 심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99~100
“유서를 남겼어.” 피베스가 말했다.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더군. ‘나의 행동이 내 가족과 제국, 총통에게 누가 되지 않길 바랍니다. 하일 히틀러! 독일제국 만세! 빌헬름 슈투카르트.’” “협박을 받은 걸까?” “아마 그렇겠지.” “시체를 발견한 사람은 누구야?” “그게 기막힌 장면이라니까.” 피베스는 그것이 무슨 독이라도 되는 듯이 한 단어 한 단어씩 뱉어냈다. “미국 여기자야.” 그녀의 진술도 파일에 있었다. 샬럿 맥과이어, 나이 28세, 미국 뉴스 에이전시인 월드 유러피언 피처스의 베를린 주재 특파원. “암캐 같은 년이었어. 연행될 때부터 자기의 권리가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더군. 권리? 젠장!” 그리고 피베스는 시넵스를 들이켰다. “빌어먹을, 이제 미국인을 정중하게 모셔야겠더군, 안 그래?” --- p.134
루터, 루터. 마르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심장질환과 백내장을 앓고 있는 칠순이 가까운 노인. 지나치게 의심이 많아 부인조차도 믿지 못하는 남자. 게슈타포는 6개월 전부터 노리고 있었지만 당신은 운 좋게 모면했었군. 베를린 공항에서는 왜 사라진 거지? 왜 세관을 무사히 뚫고 나온 후 공모자들에게 전화를 한 거지? 슈투카르트의 아파트에서도 전화벨이 계속 울렸을 것이다. 유혈이 낭자한 고요한 욕실 옆에서. 아이슬러의 사망 추정시간이 정확하다면 그 시간 뷜러는 이미 살인자들의 습격을 받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전화가 울리도록 놔뒀을까? 아니면 한 사람이 뷜러를 잡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을까? 루터, 루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목숨을 걸고 달아났을까? 폭우가 내리던 싸늘한 월요일 밤 속으로. --- p.206
샬럿은 마르크가 잠에서 깨어 자신을 보고 경악하자 꽤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범법자들이나 게슈타포, SS까지 다 상대해봤는지 모 르겠지만 이렇게 수완 좋은 미국 기자를 상대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거예요. 그것이 샬럿의 말이었다. 마르크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막스 예거의 어린 딸처럼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짐짓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의도적인 서툰 연기는 자연스럽게 더 뛰어난 효과를 거두어 마르크의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들면서 그를 연기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샬럿 맥과이어는 마르크가 듣든 말든, 위스키가 든 플라스틱 잔을 든 채로 몸짓까지 섞어 막무가내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