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최고”라고 말하기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하는 첫 마디는 “당신은 끔찍하고 악하며 비참한 존재”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몹시 불쾌한 소식으로 전도를 시작하라고 사람들을 훈련하고 있다. 이렇게 말이다. “안녕, 내 이름은 제프야.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있잖아, 너는 죄인이야.” 이렇게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뭐가 문제지? 어쨌든 사실이잖아!” 그렇다. 사실이다. 우리는 망가진 존재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 해도, 하나님은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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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이라는 러닝머신 위에서 분주히 뛰어다닌다. 그리고 모든 일을 마치면 “내 아들아 내 딸아, 참 잘했다.”라는 소리를 듣기 원한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러닝머신 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를 전혀 다른 길로 향하게 만들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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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라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음울하고, 어둡고,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기독교는 믿음의 축제다. 성대한 잔치다. 하나님이 이곳에 계신다! 우리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라!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다 함께 축하하자.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씩 파티를 즐기는 것이다. 춤추고, 먹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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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예배할 때, 다른 사람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중심이 그 사람에게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 속을 뒤집어놓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라도 우리는 그에게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베풀 수 있다. 우리의 존재 가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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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가장 큰 특징은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상은 매우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바로 우상의 매력이자 힘이다. 우리는 우상이 공격을 당하거나 제거될 때까지 그것이 우상이었는지를 잘 모른다. 우상인지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을 한번 찔러보는 것이다. 그것이 우상이라면 잔인한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짖어댈 것이다. 우상은 언제나 그렇다.
--- p.156
나는 자라면서 이 땅을 떠나는 것이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날이 오면 우리는 하늘로 올려져 이 역겹고 죄악된 땅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직접 이곳에 다시 오기 원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는 우리의 재정, 학업, 성생활, 직업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 p.163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해를 하거나, 고통을 가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받아들일 만한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를 만드신 그분 때문에 우리는 이미 가치 있다. 우주의 창조주가 우리를 존재하게 하셨기에, 심지어 그분이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에(습 3:17) 우리에게는 내재적인 가치가 있다.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말씀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성경에는 오히려 그 정반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 p.198
누군가 성희롱이나 성폭행을 당했다면, 절대로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이 어디를 가고, 무엇을 마셨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해자들이 악을 자행한 것뿐이다.
누군가 지갑을 도둑맞고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누가 내 지갑을 훔친 것 같아.” 그러면 우리는 “증거 있어? 그날 밤에 술 마셨던 거 아니야? 그때 어떤 옷을 입고 있었지?”라고 질문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의 신체를 범할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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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이 3년은 족히 알고 지내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날을 보낸 기록을 읽으면서, 예수님 생애 최고의 설교를 보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하다못해 지난 3년 동안 가르치셨던 모든 내용을 밤새 요약정리하도 해주실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곳에는 화이트보드도 없었고, 교탁도 없었으며, 조직신학 책도 없었다. 예수님은 “얘들아, 알겠지? 여기 속죄에 대해 요점을 정리해 두었으니 꼭 암기하고 앞으로 전개될 신학 진리들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와 비슷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다.
--- p.212
우리가 바라는 기독교는 모든 해답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방에 나타나셔서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믿어야 할지 내 귀에 들리도록 말씀하실 수는 없는 것인가?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에게 그렇게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앉았을 때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께 모든 해답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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