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먼저 있고 나서야 고운 단풍이 들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다. 불처럼 타오르는 삶의 열정도 내 안에 깨끗함이 우선되어야 한다. 맑은 정신에서 살림의 창조력이 발원(發源)하는 것이다. 내 정신을 맑힐 때 비로소 내 인생이 본연의 색을 띨 수 있다는 말이다.
깨끗한 정신 없이 풍요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허무만이 있을 뿐이다. 초록이 무르익지 않은 나뭇잎이 붉어지는 것은 말 그대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이는 것밖에 없다. 훨훨 타오르는 다른 사람의 삶을 빌어 자신을 태우는 수밖에 없다. 이는 끝내 허무한 재로 남는 거짓 인생이요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 준 대리인생이다.
---「가을편 [단풍]」중에서
‘삶’이라는 글자는 ‘살다’와 ‘알다’가 합해진 말이다. ‘삶’과 ‘앎’ 두 글자를 겹쳐 보면 ‘삶’이 된다. 즉, ‘삶’+‘앎’이 곧 ‘삶’이며 이는 곧 ‘살암’-‘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삶’이 곧 ‘사람’이다. ‘삶’이라는 추상은 ‘사람’이라는 구체성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가슴 뛰는 삶은 없다. 가슴 뛰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산다는 건 결국 사람이 되어가는 긴 여행길을 걷는 것이다. …(중략)… 그러니 몰라도 안 되고, 알되 그렇게 살지 못해도 똑같이 안 된다. 앎(知)이 없는 삶은 어둠 속을 헤매는 소경의 삶이요, 행(行)이 빠진 삶은 한 발자국도 나아감이 없는 앉은뱅이 인생이다. ‘사람답다’라는 것은 ‘삶앎답다’라는 말이니 그 삶이 과연 그 앎을 닮았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다.
---「봄편 [사람]」중에서
내 삶이 아무리 분주하고 번잡해도 내 안엔 언제나 텅 빈 하늘처럼 존재하는 고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중심축이 있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남들보다 더 빨리 팽이를 돌리려는 마음에 서둘러 팽이채를 휘두르는 데만 온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다. 그 중심이 바로 서지 못하면 아무리 팽이채를 세게 쳐도 팽이는 이내 비틀거리다가 멈추고 만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어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팽이의 중심축을 찾겠노라 하면서 정작 팽이는 돌리지 않고 뒷짐만 지고 있는 이도 있다. 중심축이 없는 팽이가 돌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돌지 않는 팽이는 그 축을 세울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내 인생은 그 축과 몸통이 하나인 팽이인지도 모른다. 팽이의 축은 보이지 않는 나의 정신이요 팽이의 몸통은 구체적 행동으로 드러나는 나의 일상이다. …(중략)… 중심이 서서 미동도 없이 도는 팽이는 아름답다. 사람도 그렇다. 내 중심을 바르게 세우지 않고는 삶이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중심을 먼저 세울 것을 당부하셨다. …(중략)… 앞서간 사람들은 우선은 나의 정신을 바로세우는 ‘홀로의 삶’을 이루었으며,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그 흔들리지 않는 중심에서 배어 나오는 삶의 향기로 내 이웃까지 넉넉히 적시는 ‘더불어의 삶’을 살았다.
---「겨울편 [팽이]」중에서
오늘 내리는 저 비가 본래 생긴 대로 내리지 않고 억지로 내릴 곳을 가린다면 우리는 혹 장미만 만나고 강아지풀은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장미만큼 예쁜 강아지풀을 말이다. 느티나무가 제 타고난 대로 그늘을 만들지 않고 돈 있는 사람만을 품겠다고 한다면 없이 사는 수많은 저 사람들은 어디에 기대어 한여름의 더위를 식힐까?
생긴 대로 충실히 사는 것이 곧 삶이고 사랑이다. 노자는 자연의 생리를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해내는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의 삶’으로 얘기했다. 공자님은 삶이 쉽고도 간단하다고 했다. 제 생긴 대로 산다면 어려울 것도 복잡할 것도 없지 않을까?
---「여름편 [생긴대로의 삶]」중에서
그러므로 ‘아름답다’라는 말은 ‘알음답다’라는 말로 고쳐 이해할 수 있다. ‘학생답다’, ‘어른답다’라는 말과 같이 어떤 사람이 ‘알음답다’라는 것은 그의 행동과 삶이 그 본래의 ‘앎’에 걸맞다는 뜻이다. 그 안의 원형적 앎이 그대로 드러나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이런 뜻에서 아름다운 사람이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아는 그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알음다운 사람, 자기 자신을 만난 사람, 자기 안에 있는 삶의 숨겨진 원리를 안 사람은 절대로 악을 행할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그런 사람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생긴 대로 사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사랑이 될 수 있다.
---「가을편 [아름다운 사람]」중에서
나도 내 삶의 끝자락에 6월 장미만큼 붉고 예쁜 꽃 하나를 피우고 싶다. 앞서간 사람들이 꽃 피운 그들의 가시를 빌리지 않고 내 안에 스스로 나의 가시들을 들이대 나의 정신을 뚫고 나옴으로써 내 꽃을 피우고 싶다. 십자가에 달린 저 유대 청년의 손에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 그의 제자에게 부활의 꽃을 피웠듯이 나도 내 정신의 꽃을 피우기까지 필요한 가시들을 기꺼이 감내하고 싶다.
애벌레가 겪는 고치의 어두움이 없다면 나비의 자유는 기대할 수 없다. 바닷물이 소금밭에 갇히어 한낮의 태양으로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면 하얀 소금이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는 힘겨움이 없었더라면 어린아이는 평생 땅바닥을 네 발로 기어 다녔을 것이다. 중력에 반하는 그의 의지만이 넘어지는 아픔을 딛고 아이로 하여금 두 발로 서게 하고 끝내는 뛰게도 하는 자유를 허락했다. 깊은 사색과 내 안으로의 침잠의 가시 없이 사람이 어찌 ‘나’라는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여름편 [장미]」중에서
참 힘든 세상이다. 그러니 금요일 밤이면 동네 골목마다 맥주 집에 불이 나는 ‘불금’이 된다. ‘폭탄주’로 한 주의 시간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 싶어 한다. ‘치맥’으로 일주일의 노근함을 달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치열하게 살지만 끝내는 맥이 풀리는 삶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리도 고단케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부여잡으려고 이렇게도 치열하고 팍팍하게 사는 걸까? 내가 좇고 있는 것이 정말 내게 가치 있는 것들일까? 다들 가는 길이니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긴 했지만 과연 이 길이 맞는 길일까? 내가 가야 할 내 길일까? 어느 날 문득 이런 물음이 내게 찾아온다.
---「봄편 [제정신]」중에서
인생이란 학생으로 시작하여 끝내 선생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은 내가 참사람이 되고 나의 소질과 재능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소질과 재능을 살려 전문가로서 이웃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끝내 그 분야의 선생으로 뒷사람들의 본이 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중략)…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땅에 선생이 되려고 왔다. 선생은 철저하게 자기를 살지 않고서는 될 수 없으며, 자기를 살려면 자기를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자기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를 찾아야만 하고, 자기를 찾는 고민은 배움에서 출발한다.
---「가을편 [배움]」중에서
삶은 암호와 같다. 굳이 감추지 않고 누구나 다 볼 수 있도록 드러나 있지만 그 암호의 원천이 되는 ‘소스코드(source code)’를 아는 사람에게만 그 의미가 이해되기 때문이다. …(중략)… 신은 우리 삶 곳곳에서 자신의 뜻을 버젓이 보여 주고 있다. 단 볼 줄 아는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암호를 써서 말이다. 암호를 볼 줄 모르면 삶은 온통 문제투성이요 그나마 한 문제를 풀기도 벅차고 괴롭기 그지없다. 그런데 암호는 처음부터 그 반대 짝인 소스코드가 있기에 존재한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소스코드를 찾아 암호를 해독할 줄 안다면 어떨까? 그동안 문제로 보였던 수많은 골칫거리들이 그저 웃음 짓게 만드는 놀이가 될 것이다. 그 암호가 그런 뜻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한없는 신비로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겨울편 [암호]」중에서
사람은 인생에서 언젠가는 정신 차리고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 타고난 나의 기질로서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고 개발해서 전문가가 되어 봐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변화하여 진짜 나로 한번 살아보려고 태어났다. 남들의 기대에 맞추려 애쓰는 내가 아닌, 내가 살고 싶은 내 안의 나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래서 그 ‘나’를 풍성히 이웃에게 베풀어주고 가야 할 존재들이다. 참사람이 되어, 나로 살고, 사랑을 주고, 신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이다. 그러니 우선은 되어야 한다.
된 사람, 사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한 사람, 나의 소질과 재능을 살려 선생님으로 사는 사람, 그래서 나의 재능도 주고, 나의 시간도 주고, 나의 삶도 주고, 나도 주고… 끝내 다 주고 가는 사람. 그 사람이 곧 사랑이다. 우리는 그러려고 왔다.
---「가을편 [되고 살고 주고 가고]」중에서
내가 나로 살 때 나는 지금껏 없었던 단 하나의 아름다움이 된다. 그때 비로소 창조가 이루어진다. 생명 없는 모조품은 벽에 걸리지만 살아있는 창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영원토록 꿈틀댄다. 살아있어 삶이다. 그러니 내가 나 되는 것, 삶에서 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없다.
---「봄편 [나의 노래]」중에서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 선이라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 낸 착각이다. 삶이 아무리 고달파도 그 순간은 하나의 점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한 점에서 그냥 있어 보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 일을 그저 하는 것이다. 그때 삶은 쉽다고 한다.
---「여름편 [있음]」중에서
나라의 실체는 대통령도 아니요, 국회의원도 아니다. ‘나라’의 본질은 백성이다. 그리고 백성의 본체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나, 나, 나, 나… 수많은 ‘나’가 모인 것이 ‘나나…’요 곧 ‘나라’다. 이런 의미에서 나라의 문제는 곧 내 문제지, 다른 누구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社會)라는 추상적 개념은 ‘나’를 포함한 수많은 개인의 모임(私會)이라는 구체적, 실질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라꼴이 엉망이라고 말하지만 그 실질은 ‘나’가 엉망이라는 것인데 누워서 제 얼굴에 침만 뱉지 정작 일어나 엉망인 자기 얼굴을 추스를 생각들은 없어 보인다. 내가 사람다워질 때 나라는 제대로 된 국가가 된다.
---「여름편 [나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