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체온은 36.5도라는 말, 그 한 문장이 힘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쩜 우린 그랬을지도 모르죠. 36.5라는 숫자에 섣불리 따스함을 기대하기도 하고 계절과 상관없는 사계절 영하 온도에 상처를 받기도 했을지도요. 고마웠다가 미안했다가 섭섭했다가 사랑했다가 결국 알게 된 것은 저 또한 36.5도 그만큼의 따스함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따뜻했지만 제 체온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미지근할 수도 있겠다는 걸 알게 되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차갑거나 따뜻하다는 온도만으로 누군가를 정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제게 체온은, 우리가 손을 맞잡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숨겨진 이름 같았죠. 너라는 사 람과 너의 너라는 사람까지...... 사람 앞에 어떤 형용사를 붙여주고 싶어졌습니다. 사람은 다 똑같아, 라며 지쳐가는 마음을 다양한 사람으로 위로해주고 싶은 제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나의 체온이 높아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됐을 때, 연희동 카페에서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한산했던 오전 혼자 앉아 있던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었을 때, 제 전화기 벨이 울렸고 그때 카페 전체에 울려 퍼지던 음악 볼륨을 낮춰주던 주인. 차가운 인상으로만 보였던 주인의 마음을 느꼈던 날이었죠. 그 카페 안에서 변한 거라곤 볼륨 하나인데 온종일 저는 왜 그렇게 다른 세상을 사는 기분이었을까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어떤 이의 손가락 움직임 하나에 감사하기 시작한 것이. 말없이 어깨를 다독여주던 가족 생각이 났고 울고 있을 때 저 뒤에 있어주던 당신도 생각났습니다. 수많은 볼륨을 가만히 낮춰준 내 곁의 사람들, 그들이 모두 그날의 카페 주인이었던 셈이죠.
그 뒤로 저는 사람들의 사소한 행동을 관찰하게 됐습니다. 따뜻한 사람, 차가운 사람, 예민한 사람, 감성적인 사람, 활동적인 사람 등등 대수롭지 않게 붙여온 진부한 형용사 대신 오래오래 더 곁에 두고 싶은 형용사들을 붙이면서.
아침마다 인사하는 가족, 술 한 잔에 고민을 나누는 친구, 말 대신 손을 잡고도 대화할 수 있는 연인까지 우리 곁에는 빛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이름 앞에 조금 긴 형용사를 붙여보다가, 그렇게 다양한 그들을 만들어주다가, 그렇게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체온을 믿던 우리에게 체온보다 따뜻한 손짓, 발짓, 눈짓이 다가옵니다. 원고를 정리하고 있는 이곳 카페 주인에게는 또 어떤 형용사를 붙일 수 있을지 두근거립니다.
---「프롤로그」중에서
한 문장에도 여러 시제와 감정이 느껴지는 문장이 있다. 내게는 시인 P 선생님이 그렇다. 강원도에서 휴대전화 없이 사시는 선생님과 간혹 주고받는 이메일 속에는 늘 여러 시제가 떠다닌다.
생각날 때마다 통화를 할 수 없기에 가끔 주고받는 이메일에는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메일을 쓰셨을 선생님 얼굴이 보인다. 마치 늘 마지막 안부를 전하는 사람처럼.
선생님과 만날 때면 특별한 대화가 오고간다. 삼청동에서 선생님을 뵙기로 하고 주고받던 메일도 그랬다. 뵙기 며칠 전 메일에는 “글쎄, 평일 저녁쯤이 되지 않을까. 불쑥 가고 싶으면 버스를 타는 성격이라.” 한 문장이 있었다. 며칠 무슨 요일에 오시는지 캐묻던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한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그렇지, 선생님 메일에는 날짜나 시간이 없는데 늘 어느 쯤으로 말씀하시는데. 휴대전화가 없는 선생님은 불쑥 서울에 올라오실 때도 급하게 연락을 주시지 않는다. 대신 예고 없이 누군가가 그립거나 자주 가시던 인사동 골목이 생각날 때 불쑥 오시는데 집에서 나서기 전 보고픈 이에게 메일을 보내신단다. 그리고 선생님이 서울에 도착하시기 전 메일을 확인하는 인연이면 만나게 된다는 것. 선생님의 삶은, 인연의 힘을 기대해보게 하는 생활이다. 약속하지 않아 기대하지 않고, 약속을 어길 일도 없으니 섭섭한 마음도 없으시단다. 그러다가 우리가 만난다면 더 끈끈해진다는 것.
아직 선생님을 그렇게 우연히 만난 적이 없다. “오늘 시간을 낼 수 있어 조금 이따가 서울 가네. 스치듯 볼 수 있으면 보자.”
(중략)
각박하고 정확한 날짜들에 지칠 때쯤이면 신기하게 선생님 메일이 하나 와 있다. 그날도 그랬다. 만남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다가올 여러 날의 안부와 마음이 전부 녹아 있는 한 문장.
“다가오는 봄엔 볼 수 있나, 보자꾸나, 보면 좋겠구나.”
--- p.22
한 글자면 될 것도 같은데
아니, 쉼표나 마침표를 찍으면 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 문장이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런 내게 마침표를 찍어준,
당신은 그런 사람.
--- p.95
왜 출근 준비를 하는데 슬픈 영화를 보고 싶었을까 이야기하던
K도, 왜 저녁밥을 먹다가 미친 듯이 웃긴 장면이 생각날까 이야 기하던 O도, 우린 그런 종족이다. 문득 어떤 노래, 영화, 책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문득’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기는 좀 힘들다. 혼자 영화를 검색해보거나 운 좋게 집에 그 책이나 영화가 있으면 다시 보거나 그런 정도.
그러고 나면 늘 나는 왜 하필 그 시간에 불현듯 그게 생각난 걸까, 라는 마음이 들곤 한다. 아무 이유 없지만 그래도 이유는 있을 거라고 믿으며 나는 오늘도 애매한 충전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감정충격에 서서히 나를 원망하고 있을 때쯤, 내 애매함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그날이 기억난다. K와 O 같은 사람은 주변에 많았지만 이런 사람이 꼭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된 그날.
재작년 초여름 새벽 5시쯤, 영화 사이트에 들어갔던 날 댓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아마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을 꼽으라면 몇 사람 중 하나인 그 사람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이하 생략)
--- p.102
얼마 전 여행을 다녀온 선배 P는 이번에 또 책을 한 권 잃어버리고 왔단다. 나는 잃어버린 물건이 아쉽진 않은지 묻지도 않고 그녀는 잃어버린 책 대신 메일 한 통을 기다린다. 우리가 이런 데는이유가 있다. 그녀는 늘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오고 난 늘 그것을 바라봤으니까. 그녀는 ‘자발적’ 분실물을 만드는 사람, 방송작가인 선배 P의 물건들은 점점 사라진다.
그녀가 물건을 흘리기 시작했던 것은 3년 전 어느 카페에서 시작됐다. 사연은 이렇다. 샌프란시스코로 여행 중이었던 그녀는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다음 일정에 늦을 뻔했고 부랴부랴 카페를 나왔다.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던 밤, 그녀는 카페에 책을 두고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음날 카페로 향했던 그녀는 테이블에 그대로 놓인 책을 챙겼고 그때 카페 주인과 마주쳤단다. 그리고 카페 주인의 한마디. “손님 몇이 한참 읽고 갔어요. 원래 여기 있어야 할 책이었나 봐요.”
그날 그녀의 분실물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중략)
가방이 점점 가벼워지고 이제는 일부러 물건을 사서 흘릴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그녀에게도 안부 편지가 도착하지 않을까? “이제 친해졌어요.” 라는 말과 함께. 안부가 도착하기 시작하면 아마 그녀의 물건은 남는 게 없을 것 같지만.
--- p.108
조금 더 뜨겁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빛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처음 내게 왔다면.
그래서 처음이라는 말로도 귀하다면.
당신은 그런 사람.
--- p.122
그 카페에 들어설 때, 신발을 벗지 않고 집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고 집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더니 메뉴판을 건넸다. 차를 주문하고 그녀의 집 벽 한쪽을 꽉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훑었다. 시집 한 권, 소설집 한 권을 집어 들고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좋은 음악이 계속 흘렀다.
차를 끓여서 내게로 왔던 그녀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설거지를 했다. 나는 앉아 시집을 읽다가 차가 식기 전에 한 모금씩 맛을 보는 게 전부였다. 여전히 음악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있는 듯 없는 듯 아무 말 없이 화분 잎을 닦았다. 슬픈 음악에서 감미로운 음악으로 바뀔 때면 화분이 웃는 것 같았다. 내가 한 일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 일.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작은 상자를 건네주는 택배 아저씨에게 그녀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쁘게 외쳤다. 그때부터 여기가 그녀의 카페라는 것을 잊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하루에 내가 살짝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이하 생략)
--- p.132
봄에는 꽃을 따다 밟고
여름에는 깨끗한 바다로 숨고
가을에는 낙엽 노래를 들려주고
겨울에는 녹지 않는 눈을 주고.
꽤 단순한 당신의 달력,
당신은 그런 사람.
---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