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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 | 가하 | 2016년 05월 03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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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5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462g | 128*188*21mm
ISBN13 9791130006369
ISBN10 1130006360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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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희는 백영을 바라보았다. 너를 죽일 뻔한 것은 흑마이냐, 백마이냐.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지. 여희에게 필요한 것은 백영에게 곁든 염. 그리고 백영이 알아야 할 것은 여희가 백영의 다리를 살렸다는 점이다.

“부러지진 않았군.”

여희는 그대로 눈만 올려 백영과 시선을 맞추었다.

“내 덕이다. 원래대로라면 너의 다리는 부러져야 했거든.”

백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여희의 얼굴을 보았다.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

여희는 재미난 것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나는 그저 신일 뿐이다.”

이번엔 백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은은하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제 얼굴만큼이나 미색이었다. 오래 살아온 여희가 보기에도 드물게 아름다운 얼굴이었으므로 여희는 순수한 감탄으로 백영을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이냐?”
“신이라고 몇 번을 말하느냐. 말에서 한 번 떨어지더니 정신까지 떨궈놓고 온 게야? 됐으니 빚 얘기나 하자꾸나.”
“말이 죽을 것을 어찌 알았냐.”

여희는 입을 다물었다. 좀처럼 본론으로 넘어가지 않는 대화가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영은 답을 들을 심산인지 똑같이 입을 다물고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풀이해주듯 설명을 했다.

“사념이 보였으니 알지. 나의 눈은 너희 인간들과는 달라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거든. 나는 살 것과 죽을 것, 산 자와 죽은 자, 그 너머의 너머. 또 그 너머까지. 모든 걸 볼 수가 있어.”

그러니 백영이 아주 제격이었다. 백영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일렁이는 기들로 가득했으니 부러 혼을 먹지 않아도 저 염들로도 충분할 듯싶었다. 지금도 피어오르고 있는 염들을 보고 있자니 조바심이 들었다.

여희는 백영을 유혹하듯 그 시선을 잡아끌었다.

“내가 너의 활보다 나을 것이다. 오늘 너의 다리를 지켰듯이 말이다.”

가만히 여희를 보던 백영이 그 유혹에 응하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빚을 운운한 걸 보면 공으로 활 노릇을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내게서 무엇을 가져갈 참이냐.”
“나는 너의 악을 가져갈 것이다.”

백영의 눈썹이 휘었다.

“그것은 끝이 없을 터인데?”
“그러니 더없이 좋지 않니. 지금 같아선 매일같이 너의 뼈와 살을 먹어도 모자람이다. 허니 내 기력을 차릴 때까지는 너의 곁에 있어야겠다.”
“기력을 차린다?”

여희는 한숨을 쉬었다.

“내 여기에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나갈 때까지는 시일이 걸리는지라 이리 있는 것이지. 네게 드리워진 염들을 먹고 힘을 쌓으면 이 궁을 나갈 것이다.”
“궁 안의 여인들은 죽어서야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게냐.”

여희는 비죽이 웃었다.

“아주 잘됐군. 이것은 죽은 지 오래이니 언제든 나갈 수 있겠구나.”

어느덧 동이 터 방 안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시 잠깐 그것을 보던 백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 빚은 갚아야지.”

하얀 손이 뻗어와 여희의 목을 쓸더니 그대로 손아귀에 틀어쥐었다.

“원하는 건 마음껏 먹어라. 모다 너에게 주마. 지아비가 되어 그것 하나 못 해주겠느냐. 어디 얼마나 활 노릇을 잘하는지 구경 한 번 해보지.”

손길과는 다른 다정한 목소리로 백영이 속삭였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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