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교수. 우리나라 핵의학의 초창기부터 활약하며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핵의학을 세계 4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핵의학회 사무총장, 아시아핵의학협력기구 회장을 역임하면서 개발도상국가에 첨단 의료 환경과 교육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에 헌신해 왔다. 투병 중에도 300여편의 SCI급 논문을 써서 10,000회 넘게 인용되는 등 경이로운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한편 서울대학병원 의학역사문화원장직을 맡아 의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힘쓰면서 의학자이자 수필가로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감싸안는 글을 써왔다. 산문집으로 [젊은 히포크라테스를 위하여], [소소한 일상 속 한 줄기 위안], [참 좋은 인연], [다른 생각 같은 길(공저)]이 있다.
이제 우리 또래는 대학과 병원에서 원로 대접을 받는다. 각 과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병원장이 동기 동창이니 직원 대부분이 손아래다. 대학에서는 선임교수라고 하지만 행사 때 주로 건배를 의뢰받는다고 일명 건배 교수라고도 한다. (중략) 출퇴근 때 지하철을 타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은 없다. 거의 모두 회사에서 퇴직했고 남은 사람은 CEO가 되어 회사 차로 모시고 다니기 때문이다. 동년배 교수들끼리는 농담 삼아 “우리도 기사가 모는 BMW를 타고 다닌다”고 한다. 여기서 BMW는 독일제 고급 승용차가 아닌 Bus, Metro, Walking의 약자다. 아들이 내게 “한국 남자에게 가장 편한 직업이 뭘까요?”라는 문제를 냈다. 정답은 군대의 병장이란다. 제대를 앞둔 말년이라 상관도 간섭하지 않고 아래 장병에게 지시만 내리면 되는 편한 직업이란다. 선임교수가 어떤 직책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 p.40
지난 십 수 년 동안 우리 의대 교수 중 6명이 암으로 위절제 수술을 받았다. 우리는 재미 삼아 무위(無胃) 도사 클럽을 만들었다. 특별한 활동은 없고 가끔 생각나면 서로 방문하여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다. 노자는 “무리해서 무엇을 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것”을 무위(無爲)라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위(無爲)로서 무위(無胃)를 서로 위로하는 셈이다. (중략) 무위사상에 따라 살면 큰 돈이 들지도 않는다. 수십억, 수백억 원이 다 속 빈 위장관에서 생긴 헛된 욕망이다. 무위(無胃)가 되어 헝그리 정신이 없어진 우리는 “무위(無爲)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에서 인생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고 있다. --- p.111
그의 상점을 방문하여 평생 수집한 애장품들을 보았다. 시계는 인류의 지혜를 총망라한 듯 다양하기도 했다. 금속 볼을 수차에 이용한 시계, 이슬람 성지인 메카의 방향과 시간을 함께 알려주는 아라비아 시계, 온도에 민감한 특수 액체의 수축과 팽창 에너지를 이용하여 영구 작동하는 아트모스 시계, 정오의 강력한 햇살을 볼록렌즈로 모아 대포 심지를 태워 작동하는 캐논 시계가 특히 흥미로웠다. 그 중 가장 낭만적인 것은 중국산 용선명이 시계다. 용머리를 선두에 조각한 좁고 긴 카누 모양의 자기그릇 바닥에 기다란 향나무를 놓고 그 위에 구슬을 두 개씩 무명실로 연결하여 9쌍을 가로로 얹어놓았다. 향나무 꼭지에 불을 붙이면 점차 타 내려가면서 그 위에 얹힌 무명실 역시 순서대로 끊어지는데 그 때마다 구슬방울이 징 위에 떨어지는 소리로 시간을 알려 준다! --- p.150
이렇게 맹활약하던 선생님이 70대 중반에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과거 뇌졸중으로 손상된 대뇌 조직에 알츠하이머 병이 겹친 것이다. 얼마 전 병원 행사 때도 말씀에 조리가 없어 혹시나 했던 기억이 스쳐갔다. 그렇게 논리적이고 명석한 분이었는데 최근에 급속히 진행되어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뒤따랐다. 얼마 후, B교수님의 전공 학회가 대구에서 열렸다. 학회 진행을 맡은 학술이사는 한참 전에 특강을 부탁했지만 요양원 입원 소식을 듣고 못 오실 것으로 판단하고 프로그램을 변경했다. 사정을 모르는 B선생님은 병중에도 강의 요청만은 기억해 학술대회에 가야 한다고 가방을 들고 요양원을 나섰다. 학회에는 안 오시고 선생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학회장이 발칵 뒤집혔다. --- p.210
선생님에게서 벼룩의 혈압과 맥박수를 배운 것도 술자리에서다. “지구의 중력 때문에 세상의 모든 동물이 혈압은 같고, 맥박수는 체중에 반비례한다. 그러니 벼룩의 혈압은 120/80mmHg이고, 심장은 일 분에 수천 번을 뛸 것이다.” 생명의 중요한 진리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학구적 술자리였던 셈이다. (중략) K선생님은 제자에게 음주를 권하는 방법이 독특하다. 우선 시켜놓은 술을 다 마시면 집으로 갈 듯한 태도를 보인다. 우리들이 열심히 마셔 자리를 끝내려고 하면 다시 술을 더 주문하는 식이었다. 꼼짝없이 과음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심 불안했다. 나도 문제지만 동료는 나보다 술을 더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술에 취한 동료 레지던트 p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는 선생님 길을 막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설마 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선생님이 급하게 되어 화장실을 가려는데 또 못 나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술에 취한 제자를 야단칠 수도 없고 세 번째 탈출 시도에도 실패한 선생님은 몹시 급하셨던지 애원하기 시작했다. “p형, 한 번만 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