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대 교수로 우리나라 핵의학의 초창기부터 활약하며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핵의학을 세계 4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국제적인 학술단체를 이끌며 아시아 개발도상국가에 첨단 의료 환경과 교육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일에 헌신해 왔다. 투병 중에도 270여 편의 SCI급 논문을 써서 약 9,000회 넘게 인용되는 등 경이로운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한편 서울대학병원 의학역사문화원장직을 맡아 의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힘쓰면서, 의학자이자 수필가로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따뜻하게 감싸 안는 글을 써 왔다. 산문집으로 〈젊은 히포크라테스를 위하여〉, 〈소소한 일상 속 한 줄기 위안〉, 〈다른 생각 같은 길〉이 있다.
P23 바로 옆 의대부속병원 응급실로 업고 가니 운 사납게 뇌혈관이 다쳐서 뇌출혈이 생겨 있었다. 응급 수술로 머리뼈에 구멍을 뚫고 핏덩어리를 제거했다. 술을 먹인 향우회 선배들은 죄책감에 시달렸으나 결과적으로는 잘된 셈이었다. 우선 군대에 안 가게 되었다. 머리뼈에 구멍이 있는 X-선 사진을 보자 병무청 군의관은 그 자리에서 병역면제를 선언했다. 누가 그런 머리통을 가진 사람을 군인으로 징집하겠는가? 더 큰 행운은 가까스로 의대에 합격했던 시골 청년이 그 후 공부를 아주 잘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머리뼈에 생긴 구멍을 통해 교과서 글자가 두뇌로 쉽게 들어간다는 이론을 내놓았다. 결국 2등으로 졸업했는데, “수술 당시 구멍을 더 크게 뚫었으면 수석 졸업을 하는 건데”하고 아까워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머리뼈에 구멍난 천재’ 중)
P75 종로에서 헤어지는데 바람이 불어 그녀의 긴치마가 약간 들리며 언뜻 그 안에 감추어진 하얀 다리가 보였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아리였다. 옛말이 틀린 것이 없다더니! “돌에 보석이 감추어 있어 산이 빛나고, 물에 진주가 품겨 있어 강은 고와라.” 그날 아침은 세상이 달라 보였다. 따뜻하고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갑자기 봄기운이 사방에 가득했다. 구름 낀 하늘은 환하고 새들은 연두색 어린 나뭇잎 사이에서 즐겁게 지저귀었다. 첫 수업인 고문(古文) 시간에 주왕산 선생님(주시경 선생님의 아드님)이 바깥을 보며 싱글벙글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인생이 그렇게 즐거우냐고 농담을 하셨다. (‘나의 첫사랑’ 중)
P160 하늘이는 10년을 살고 우리 곁을 떠났다. 요즘은 개도 수명이 늘어 15년은 산다는데 노년의 삶은 동물도 힘들어 주인에게 많은 걱정과 부담을 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좋게 이별한 셈이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집사람은 더 이상 애견을 키울 생각이 없단다. 어릴 때 강아지를 잃은 충격이 예방주사가 되었는지 나는 이틀 만에 하늘이와의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제는 가족 모두 마음이 정리되어 좋았던 추억만 남았다. 식탁 옆 벽은 하늘이와 식구들이 같이 찍은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다. 안규리 교수에게 들으니 요즘은 억대의 비용을 주면 생명공학 기법으로 죽은 애완견을 복제해 준다고 한다. 이러한 인위적인 인연의 반복은 찬성하지 않고 상상할 수도 없다. 하늘이에 대한 하늘의 뜻을 우리가 간섭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집 강아지는 하얀 말티즈’ 중)
P189 우리 조상들은 경험을 통해 음식 선택에도 뛰어난 지혜를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출산 후 산모가 1~2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먹는 미역국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관습이다. 출산 후 옥소(요오드) 성분이 풍부한 미역국을 먹으면 태반과 자궁내막에 분포하는 특정 수송체에서 옥소를 분비시킨다. 옥소는 유명한 소독약인 ‘옥도정기(포비돈)’에서 보듯이 강력한 살균제이다. 출산 시 생긴 자궁내막의 상처 부위에 옥소를 많이 나오게 해 감염을 막는 기막힌 예방법인 것이다. (‘제일 맛있는 음식’ 중)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학창시절을 거쳐 의사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접했던 여러 사람들과의 인연이나 경험했던 일들을 통해 생각하거나 느꼈던 바를 별다른 문학적 수사나 기교 없이 그저 진솔하고 차분한 필치로 써 내려간다. 특별하거나 새로운 사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잔잔한 감동과 문학적 향취는 물론 일종의 정신적 치유까지 맛볼 수 있었다. 성공한 의사로서 '포스' 같은 것은 거의 느낄 수 없었고, 오히려 저자의 깊은 인품의 향기가 짙게 느껴져 책을 읽는 내내 흐뭇했다. - 박규은 (법무연수원 교수/부장검사)
그의 밝고 성공적인 삶의 내면에는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일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글은 그의 사람됨같이 꾸밈이 없고 맑고 편안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에 위안이 다가온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독자들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리라 믿는다. - 유병철 (성균관대 서울삼성병원 교수)
그의 글은 문학적 미사여구가 없어도 진솔하여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글의 주제를 다시 숙고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아마 위암과 신경병을 극복하면서 삶의 가치와 인간사를 더욱 깊이 터득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