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하던 시절의 문화 창구였던 만화
변변한 문화적 장치가 없던 시절, 만화는 어린이들이 꿈과 상상력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가난하던 1960~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지금의 어른들에게 만화는 정서적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작은 용돈이라도 생기면 곧바로 만화가게로 달려가 뜨거운 어묵 국물을 호로록 마시면서 손때 묻은 만화책을 넘기던 기억이 아련하고 정겨운 장면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어른들의 생각은 이중적일 때가 많습니다. 만화에 대한 향수를 마음속에 꼭꼭 감춘 채, 만화가 정서 발달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는 가볍고 거친 장르라고 편협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또는 ‘재미와 흥미’라는 당의정을 발라 어린이들을 학습으로 유인하는 보조수단 정도로 만화의 가능성을 좁혀 생각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하지만 만화는 그 자체로 엄연한 독립적인 장르이자, 종합적인 예술입니다. 책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는 것처럼, 만화에도 좋은 만화가 있고 나쁜 만화가 있을 따름입니다. 더구나 앞으로는 보다 폭넓은 상상력과 보다 종합적인 표현의 힘을 요구하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지금까지도 그렇지만, 만화는 그 어느 장르보다도 자유분방하고 다양한 발전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예술 형식이 될 것입니다.
이 책에 대하여
<밥보다 만화가 더 좋아>는 흔하디흔한, 성공한 사람의 후일담을 전해주는 책이 아닙니다.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집단 ‘오돌또기’의 공동대표인 박재동이 지금의 일을 하기까지의 성장과정, 만화에 대한 꿈과 사랑, 앞으로의 계획 등을 어린이 독자들에게 진솔하게 들려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기획하고 출간하면서 아동문학작가 이영옥과 산하출판사 편집부는 이 책의 주인공인 박재동 화백과 숱하게 만나 책의 방향에 대해 상의하고 토론했습니다. 박 화백이 어릴 때부터 쓰거나 그려온 일기, 공책, 스케치북들을 일일이 검토하고 그 시절에 즐겨 읽던 만화책들을 살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235컷의 도판을 선별하여 풍부한 볼거리를 담았으며, 박재동 개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만화에 대한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책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개구쟁이 소년이 만화가가 되기까지
박재동은 경상남도 작은 시골마을 모래골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아버지가 병 때문에 교사를 그만두기 전까지입니다. 어린 시절, 재동은 하루해가 짧을 정도로 산과 강가에서 뛰놀던 개구쟁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생활터전을 부산으로 옮기면서, 재동에게도 또 다른 경험의 세계가 열립니다. 대도시에 도착한 시골아이 재동은 이사하게 된 집을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문예당’이라는 간판을 단 만화가게가 새로 살게 된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벽마다 천장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만화책들…. 다음날부터 재동은 정신없이 만화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라이파이>, <약동이와 영팔이>, <와당탕 일등병>으로 시작된 재동의 만화 편력은 서부극 만화, 로봇 만화, 순정 만화, 명랑 만화, 역사 만화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확대됩니다. 학교 미술반에 가입하여 그림을 열심히 그리던 재동에게 담임선생님이 포스터를 그려 오라는 과제를 내 줍니다. 주제는 ‘만화방 안 가기’와 ‘불량식품 안 먹기’. 재동이 만화방 주인의 아들인 걸 모르고 시킨 과제이지만, 이 일은 어린 재동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만화가로 첫발을 내딛다
부산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재동의 만화 습작이 본격화됩니다. 스케치북은 물론이고 공책의 귀퉁이, 일기에도 꼬박꼬박 그림들을 채웠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보고 흉내 내 그리거나, 그날그날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재동은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잡지에 투고하거나, 때로는 반 친구들에게 팔기도 하면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지만, 성적이 떨어진 탓에 고등학교 입시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재수 시절, 좌절감과 외로움 속에서 재동은 처음으로 114쪽짜리 장편만화를 완성합니다. <내 가슴에도 봄은 왔습니다>는 그리운 고향의 풍경, 행복했던 어린 날의 추억과 자신의 현재 심정으로 오롯이 담긴 작품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새로운 도전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박재동은 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정해진 형식과 틀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그리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미술 교육이 되도록 노력하던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생활은 즐겁고 행복했지만, 어릴 적부터 꿈꾸던 자신만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 무렵, 자신의 그림에 인간의 삶과 역사가 빠져 있다고 한 어느 제자의 말이 가슴 아픈 반성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한겨례신문’에서 한 칸짜리 그림마당을 맡아 시사만평을 그리면서 박재동은 독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뜨거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간결하면서 핵심을 찌르는 표현, 날카로운 비판정신과 부드러운 따스함을 한데 녹인 그의 그림들은 우리나라 신문 만평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또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의 정서와 보편적인 예술성을 함께 담은 한국형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입니다.
박재동이 어린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알고, 그렇게 되려고 해 온 사람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보였고, 교사를 할 때에는 교사가 가장 훌륭한 직업이라고 여겼습니다. 만화가가 되어서는 만화가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은 애니메이션 감독을 꿈꾸고 있습니다. (…) 여러분도 마음으로부터 정말로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일을 꼭 찾아내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