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사데크의 책이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에리크가 찾는 장의 책 『눈먼 부엉이』였다. 백 부 한정으로 나온 책은 페르시아어와 한국어 대역본으로 가죽 양장에 금과 은으로 테두리를 장식하고 비단으로 수를 놓으려 했으나 당시 출판업자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냥 문고본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국판 『눈먼 부엉이』는 1982년 라이프치히 국제도서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한 권의 책에 선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혁신적인 그리드와 투명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표지” 때문이었다. 에리크는 세계를 떠돌며 사데크의 판본 대부분을 모았다고 했다. ---「눈먼 부엉이」중에서
레이날도는 뉴욕에 자리를 마련했다. 뉴욕은 환상적이었다. 높은 빌딩과 고풍스럽고 세련된 극장, 아름다운 남자와 우아한 여자들. 겨울이 되면 눈이 왔고, 가을에는 낙엽이 졌으며, 여름에는 해변으로 갔고, 봄에는 바람이 불었다. 눈. 레이날도는 특히 눈이 좋다고 했다. 쿠바 사람들에게 눈은 여신 같은 존재야. 음악이고 꿈이고 섹스지. 레이날도가 말했다. 나는 레이날도에게 뉴욕에서는 행복했던 거냐고 물었다. 망명자는 도망치는 존재야.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어. 레이날도가 말했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거냐고 물었다. 레이날도는 의자 깊숙이 묻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나로부터 도망치는 거야, 친구. 나로부터. ---「뉴욕에서 온 사나이」중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역사가 끝났다는 말은 장의 입장에선 헛소리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세기에 살고 있었다.” 나나 미주가 21세기에 산다면 장은 20세기 초반을 살고 있었다. 나는 장이 이런 인간이라는 사실을 애초에 알았지만 미주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장은 내게 비행기 삯을, 미주에게 여행 경비를 빌렸다. 미주는 장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미주에게 모스크바에 오길 잘했다고 말했다. 붉은 광장은 시시했지만 창밖의 눈은 시시하지 않다고, 모든 게 변했어도 창밖에서 내리는 눈은 사빈코프가 본 것과 같을 거라고 말했다. 미주는 내일은 같이 학교에 갈 거니 잠이나 자라고 했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봤다. 작은 눈송이들이 창문을 쉬지 않고 두드렸다.” ---「창백한 말」중에서
그 문장은 진의 데뷔작에 나왔던 것이었으나 그로선 알랭의 수첩에 적힌 프랑스어가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모든 일의 시작엔 사랑이 있다고 했던가. 그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유치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알랭이 한국에 머물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진의 데뷔작에 나온 문장은 알랭을 한국에 단단히 붙잡아뒀을 뿐 아니라 알랭이 쓰고자 하는 글의 단초가 되었다. 그리고 장의 이야기와 소설이 마지막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미래의 책」중에서
그는 늪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선생의 옆에 조심스레 앉았지요. 그리고 미국에 가도 되는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선생은 미국에 가려면 펜실베이니아로 가라고 하더군요.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펜실베이니아로 가라고 여러 번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내친김에 설계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평소와는 달리 겁 없이 물었고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늪을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실을 그리세요. 그는 자신의 경험, 처음 입사한 회사에서 3년 동안 욕실 도면만 그렸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일종의 건축적 면벽 수련입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중에서
레이몽 루셀은 자서전에 자신에게 남은 건 죽음 이후 부활할 거라는 희망뿐이다라고 썼다. 나는 그가 레저렉티느를 맞고 죽음에서 돌아오면 인생의 어떤 시점을 반복할 것인지 생각했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위고나 쥘 베른처럼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할 것인가, 망상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가, 그렇다면 죽음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플로베르는 1847년 편지에 자신은 잠을 자거나 담배를 피우듯 나 혼자만을 위한 글을 씁니다라고 썼다. 우리는 묘지 위를 걷습니다. 나는 한 사람의 인간-펜입니다. 나는 바위입니다.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중에서
톰은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소설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표지는 어떤 소설과도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설 역시 어떤 표지와도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좋아요. 톰이 말했다. 제 책이 다음 권으로 나올 겁니다. 알퐁소가 말했다. 알퐁소는 웃고 있었고 처음 봤을 때보다 노쇠했으며 지쳐 보였다. 톰은 새 작품이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알퐁소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뜸을 들였다. 런던의 궂은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클레망틴이 말했지요. 선인세는 없다고. ---「여행자들의 지침서」중에서
트랙터에는 조지 스마일리와 그의 일본인 의붓딸 마오가 타고 있었다. 조지 스마일리는 잘 관리된 치아와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를 질끈 묶은 노인으로 전향한 스파이이자 보르쿠타 탄광의 십장이었다. 마오는 아기 때 그가 런던에서 업고 왔으며, 보르쿠타에서 자라 일본말은 못한다고 했다. 조지 스마일리는 마오의 이름을 마오쩌둥에게서 따왔고 이는 화해와 통합의 의미라고 했다. 우리는 마오가 건네준 장대를 붙잡고 트랙터에 올라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 위로 눈이 내렸고 흰빛과 회색빛, 눈보라와 음성이 어둠 속을 오갔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람을 콜호스에 보내는 거예요. 콜호스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가 바로 콜호스를 생각하고 있을 때다. 이게 우리의 모토예요. 눈 속에서도 상우의 선전방송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