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은 걸인, 나병환자, 불구자, 장애인들을
그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여 경멸하였다.
하느님으로부터 잘려진 불순하고 더럽고 악한 자들로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거룩한 성전에는 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은혜도 입지 못하고 가치도 없는 그들은
온갖 천대 속에서 살아야 했다.
자연히 그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살아 있는 것 자체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분노로 치를 떨며 신음하였다.
혹은 정신병으로 도망치고
자기에 대한 절망과 혐오로 몸부림쳤다.
그들은 자신의 이 생과 다음 생에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저주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배경」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인간의 언어가,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히려 손상시킬 만큼,
제한된 것임을 본다.
하느님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다.
그분은 두 성을 모두 초월하신다.
우리 인간들은 너무나 독단적인 존재들이다.
우리의 언어는 현실의 경험에서 나온다.
그 언어가 가리키는 진실에 닿기가 무척 어렵다.
우리는 감정과 고통의 자물통에 채워져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유한하고 부서지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아버지들과 같은 아버지가 아니시다.
실제로 우리 아버지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정반대일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 곧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이해하게 도와주는
하나의 표시(標示, sign)임을 깨달을 때까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예수의 ‘아버지’는 근원이시다. ---「예수」
예수에 걸려 넘어진 자들은
그분이 너무나 급진적인 이상주의자요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 자들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재물을 가난한 자들과 나눈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폭력을 쓰지 않는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용서하고 또 용서한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어린아이처럼 된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단 말인가?
묻고 또 묻고,
머리로 이해하고자 한 자들은
기다리기를 거절하였다.
그분의 가르침과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자들은
믿고 따르기를 거절하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넘어뜨리고 일으키시는 예수」
그분이 당신 나라에 오셨지만
당신 백성은
자기들이 기대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드럽게 용서하는 사랑,
어린아이처럼 되라는 조용한 권면,
나약하게만 보이는 비폭력,
꼴찌 자리를 차지하라는 가르침은
단단한 시멘트 벙커와도 같은
권력체제에 의하여
난폭하게 밀쳐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
서로 마주하는 양극이 있다.
사랑과 부드러움과 진실을 호소하는
순결한 어린아이가 이쪽에 있고,
분노,
거짓,
교만,
편견,
증오,
어둠,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옳다는 확신으로 무장된 체제에 갇혀 있으면서
돌처럼 굳어진 가슴의 어른들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저쪽에 있다. ---「고통과 초라함 속으로 내려가는 예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동안
하느님의 영이 흐르지 못하게
막고 있던 장벽들을 허물어뜨렸다.
드디어 수문이 열렸다.
하느님의 영,
예수의 영이
곧장 사람들 가슴속에 들어오시고
거기를 당신 거처로 만드신다.
성령의 은총으로
두려움과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바야흐로 경계와 문화를 넘어
서로 손을 잡고서
모든 민족, 모든 인종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 된다. ---「살아나신 예수」
강하고 넉넉한 자에게는 남들이 필요 없다.
그는 자기만으로 충분하다.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는 남들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우리에게 힘을 넣어주려고
우리의 굳어진 가슴을 녹이고,
자신의 약함을 보호하고
외로움과 두려움을 감추려고 쌓아놓았던
장벽들과 방어기제들을 무너뜨리려고,
말씀이 몸이 되고 나약함이 되셨다.
존재의 중심에서 우리를 만져주고,
우리 안에 깊숙이 잠재된 힘을 일깨워
사랑과 자비로 살아나게 하시려고,
그분이 오셨다. ---「마치는 말」
나에게 예수는 그의 가르침이나 말을 무턱대고 믿어야 할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그가 가르친 대로 살아봐서 그의 진실이 저절로 믿어져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거나 아니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까닭에 포기하고 등져야 하는 그런 존재였다. 장 바니에가 내게 이토록 절친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머리 아닌 몸으로, 논리 아닌 삶으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이 진실임을 입증해 보이려는 기본 자세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