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생. 도신초-우신중-경기고-단국대를 거쳐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 2005년 데뷔했다. 데뷔 첫해부터 마무리 투수로 발탁되어 신인왕,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이름을 알렸다. 이후 한 시즌 세이브 아시아신기록(47세이브)를 2번이나 기록했으며, 역대 최다 세이브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묵직한 공을 던진다 하여 ‘돌부처’, ‘돌직구’ 등의 별명을 갖고 있으며, 상대 팀 입장에서 너무 상대하기 힘든 투수라는 의미에서 ‘끝판왕’이라고도 불린다. 2014년 일본 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 해외 진출 첫해부터 세이브왕에 오르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LA다저스의 류현진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발투수, 마무리 투수로 거론된다.
저자 : 이성훈
SBS 보도국 스포츠부 야구 담당기자.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시리즈에 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아들만 둘을 보신 부모님은, 셋째가 딸이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1982년 7월 5일, 전북 정읍의 한 산부인과에서 셋째마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쉬움이 무척 크셨던 것 같다. 얼마나 아쉬우셨는지, 큰형과 작은형이 아기였을 때 입은 옷들이 있었음에도 여자 아기 옷을 새로 구해 나에게 입히셨다. 세 살 때쯤인가는 예쁜 쌍꺼풀이 생기라고 눈에 테이프를 붙여 주셨다는 이야기도 나중에 들었다. 원피스를 입고 머리까지 양쪽으로 곱게 땋은 4살 때의 내 사진이 남아 있는데, 사진 속의 나는 영락없는 ‘막내딸’로 보인다. 그러나 나의 ‘막내딸 노릇’은 오래가지 않았다. 부모님의 희망과는 반대로, 나는 너무나 전형적인 개구쟁이 사내아이였다.
프로지명을 앞두고 미래가 결정될 시기에 투수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평생 홈런은 딱 한 개에 발 빠른 것 빼곤 잘하는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외야수에게 관심을 가질 프로팀은 없었다. 고3에게 프로 신인 지명은 인생을 바꿀 사건이지만, 내겐 남의 일이었다. 눈과 귀를 닫고 운동만 했다. 어느 날 혼자 운동장을 뛰고 숙소로 돌아오니 동기들이 아무도 없었다. 후배들에게 물어보니 다 같이 PC방에 갔다고 했다. 게임하러 갔나 싶어 나도 PC방으로 갔다. 그런데 친구들이 모니터 하나에 다 매달려 있었다. “무슨 일 났냐?” “너 어디 아프냐? 오늘 프로 신인 드래프트날이잖아” 차라리 끝까지 모르는 게 나을 뻔 했다. 모니터에 동갑내기 친구들 이름이 차례로 떴지만, 내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다른 학부형들로부터 “승환이가 어쩌다 저렇게 됐어요”라는 질문인지 위로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인사처럼 듣고 다니셨다. 불과 2년 만에 나는 메이저리그를 꿈꾸는 유망주에서, 모두가 불쌍히 여기는 낙오자로 추락한 것이다.
잠시 스트레칭을 멈추고 후지카와와 이종범 선배의 대결을 뚫어져라 지켜봤다. 2스트라이크에서 3구째를 맞춘 타구가 이종범 선배의 정강이를 때렸다. 보는 내 입에서 절로 ‘악’ 소리가 났다. 한참 고통스러워하던 이종범 선배는 간신히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순간 우리가 경기하고 있는 이 큰 경기장이 무등경기장인 것만 같았다. “이! 종! 범! 이! 종! 범!” 아픈 다리로 스윙을 버틸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선배가 공을 쪼갤 듯 방망이를 휘둘렀다. 후지카와의 빠른 직구가 그보다 더 빠른 스윙에 걸려들었다. 총알 같은 타구가 유격수 키를 넘어 좌중간을 갈랐다. 2점을 얻었고, 이종범 선배는 3루까지 내달렸다가 야구 역사상 ‘가장 환한 웃음의 주루사’를 당하고 더그아웃으로 포효하며 들어갔다.
9회초, 잠실야구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경기가 그렇게 그대로 끝날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첫 타자는 최정. 배트 스피드가 빠른 정이는 내 공을 잘 건드렸다. 하지만 나도 그날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8회에도 3구 삼진을 잡아내 감도 좋은 상태였다. 일단 초구부터 직구로 윽박질렀다. ‘딱!’ 내 귀에도 경쾌한 소리였다. 약간 비틀거리다 타구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넘어가지 마라, 가지 마라’ 속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나중에 TV를 보니 나는 얼빠진 얼굴로 타구가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가고 있었고, 타구는 잠실구장 백스크린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단순히 동점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타구가 넘어간다면 분위기가 완전히 SK로 넘어갈 게 확실했다.
클라이맥스시리즈의 전 경기 등판했고, 정규시즌까지 따져보면 10경기에 연속으로 등판하고 있었다. 연속 등판은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중간에 휴식을 취한 걸 생각하면 연속 등판 대접받는 게 조금 민망한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1승이 중요했다. 4차전의 분위기는 완전히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타선이 초반부터 홈런 3방을 터트리며 점수차를 벌려갔고 내가 등판했을 땐 8대 2로 앞서 있었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점수차였지만, 헹가래 투수를 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결국 4일 연속 벌어진 파이널스테이지의 모든 경기에 등판하게 됐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꼬였다. 등판하자마자 첫 타자 세페다에게 솔로홈런을 맞은 데다 다음 타자 사카모토에게도 백투백 홈런을 내준 것이다. 요미우리가 8대 4로 따라왔다.